“여기 와서 양파 좀 까세요.”
서빙 실장님은 주방과 맞닿은 홀 한켠에 세워져 있는 20kg짜리 붉은색 양파주머니를 가리켰다.
'헉!! 저걸 다 까라고?‘
평소 양파의 매운 내를 잘 견디지 못했던 나는 못 하겠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훌쩍훌쩍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양파를 깠다.
내 손길이 어찌나 느리고 성에 차지 않았는지 20kg를 다 까게 하지는 않았지만, 실장님에게서 나에 대한 마뜩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기숙사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진 작은 상업 지역에 위치한 중국 레스토랑이었다. 중국 레스토랑 서빙은 처음이라 정장 같은 유니폼을 입고 서빙 업무를 익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식기의 종류와 반찬, 요리 이름이 모두 낯설었다. 지금은 동네 중국집에서조차 흔하게 제공해 주는 ’ 짜사이‘를 그때 처음 접했다. (그땐 그 이름도 못 외웠다.)
배달하는 중국집이 아니라서 지원했다. 'Chinese Restaurant' 이라니. ‘뤠스토랑’이라는 단어는 남들에게 말하기도 멋있을 것 같았다. '뤠스토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홀에는 둥그런 중국식 회전 테이블과 화려한 테이블보가 깔려있었고, 어두운 벽 색깔에 붉은 중국식 등과 금색 실이 수 놓인 깃발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 곳에서 검정 스커트에 베이지색 재킷이었던 유니폼은 그 자체로 '중국집'이 아니라 '뤠스토랑'임을 상징했다.
직원들 점심 식사로 마파두부밥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고, 직원 중 내가 가장 어려서 다들 친절하게 대해줬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양파 한 망을 다 까지 못한 죄책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나를 밀어내는 듯한 공기 흐름을 느꼈다.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내일 또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녹초가 되어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룸메이트에게 중국 식당 알바 너무 하기 싫다고 얘기했더니 자기가 해결할 테니 맡겨보란다. - 지난 회차에 등장했던 사회 경험 많은 룸메이트와 동일 인물임.
다음날, 알바를 하러 갈 시간이 되었을 때 룸메이트가 식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 어제 거기서 알바했던 00이 언닌데, 애를 어떻게 부려먹었길래 애가 몸살이 나서 드러누워요?!! 거기 알바 안 보낼 거니까 그렇게 아세욧!!!”
룸메이트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다 진땀이 났다. 사장님은 별다른 말씀 없이 이렇게 끝맺게 되어 아쉽고, 하루치 알바비를 줄 테니 몸 다 나으면 받으러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회피해 버린 내가 한심스러웠다. 서빙은 어떻게든 하겠지만 양파 까는 건 도저히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세상에 대한 모든 게 서툴기만 했던 스무 살의 철없는 나의 행동을 마흔이 넘어서야 스스로 나무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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