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ING 생명 차00 FC님 비서입니다. “
뚝. 뚜— 뚜— 뚜—
‘목소리 톤을 너무 높였나? 쓸데없는 홍보 전화라고 생각했을까?’
일면식도 없는 수화기 너머의 고객에게 목소리만으로 나의 발신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힘겨운 숙제 앞에서 나는 고뇌에 빠졌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자괴감이 들었고, 서러웠다. 누구도 명쾌하게 답해줄 수 없는 머릿속 질문들을 뇌 한쪽으로 밀어둔 채 다음 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시간이 별로 없다. 오늘 안으로 20명 정도는 전화를 돌려야 한다.
”안녕하세요~ 박00 고객님이시죠? 저는.. ING생명 차00 FC님 비서입니다."
“비서요? 비서도 있어요? 무슨 일 하세요?”
수화기로 너머로 들려오는 젊은 남자의 말투에는 조롱이 섞여있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고객님’이기에 마른침 한 번 꼴깍 삼키고 애써 친절한 말투를 장착했다.
“아... 저는... FC님 고객 관리하고 서류도 정리하고...“
“아~~~ 그래서요?”
“이번에 고객님 연락처를 정리하는데요... 주소하고 전화번호 확인 좀 하려..아니, 해주실.. 아니, 해주시면..."
침착하려 할수록 목소리는 떨려오고 단어가 꼬였다. 내 자리에만 뜨거운 히터가 켜져 있는 듯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한 번도 만난적 없는 수화기 너머 (건방진)고객(놈)의 비웃는 표정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3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통화였지만 300분 동안 말씨름한 만큼의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어릴 적부터 전화 통화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었다. 친구들과의 통화는 문제없었지만,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는 상대방이나 어른들과의 통화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잔뜩 긴장된 상태로 발음이 꼬이거나, 머릿속이 하얘져서 할 말을 잊은 채 통화를 끝내곤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내용이 있어도 다시 걸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보험 설계사의 고객과 매일 전화 통화를 해야 하다니! 문서 작업 외에 고객 연락처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업무를 전달받을 때부터 가파르게 긴장도가 상승하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다른 직업군으로 이직을 하던 중간 몇 개월 쉬는 사이에 '보험설계사 개인 비서'라는 구인 제목이 눈에 띄었다. 개인 비서라고?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돕는 역할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ING 생명'의 한 지점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남자 FC와 여자 FC가 한 팀이었는데 남자 FC는 30대 후반으로 추정, 작은 키, 7:3으로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헤어스타일, 깔끔한 정장, 느리 느릿한 말투, 보험 영업보다는 공무원이나 도덕 선생님이 어울려 보였다. 반면 여자 FC는 30대 초반인 것 같았고, 큰 이목구비, 작고 동그란 얼굴에 짧은 단발머리, 시원시원한 말투로 첫인상에도 영업직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면접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나를 채용했고, 간단한 엑셀, 워드 작업과 고객 명단 관리, 우편물 보내기 등을 하는 대가로 소정의 알바비를 제시했다. 그 당시 물가로 한 달 교통비와 점심 식대를 제하고 나면 옷 한 벌 사기 힘든 정도의 소박한 알바비였다. 그럼에도 알바를 수락했던 20대의 나는 꽤 낙천적이었던 건지, 모험심이 가득했던 건지. 아니면 ’외국계 보험회사 보험 설계사의 개인 비서‘라는 뭔가 그럴듯한 명칭에 마음이 뺏긴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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