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1 코리안 조르바
우리 아빠는 손재주 하나는 타고난 사람이다.
요리, 글씨, 수리, 그리고 운전까지. 아빠의 손끝에서는 마법이 일어났다.
어릴 적 나는 아빠가 '서울대 토스트학과'를 나왔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아빠가 써는 양배추는 마치 종이처럼 얇았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솜씨라면 흑백요리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깃집에 가면 아빠 옆자리는 언제나 인기 만점이었다. 불 앞에서 한 점도 태우지 않고 고기를 굽고, 다른 이들 입에 먼저 넣어준 후 본인은 그제야 먹었으니깐. ‘하버드대 바베큐과 졸업’이라는 농담도 덧붙여서 말이다.
집안 곳곳에는 아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TV 속 맥가이버가 아빠에게 배워갔다고, 이때는 ‘서울대 전기과’를 나왔다고 너스레를 떨고는 했다.
(이 많은 곳을 졸업하려니 얼마나 열정을 부렸을까 싶다.)
서울로 상경한 아빠는 꿈꾸던 요리사의 길 대신 가족을 위해 판매, 배달 일을 선택했다. 매일 지나치던 곳에 요리 학원이 있었는데 다니고 싶었었다고 했다. 그곳을 바라보며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20대 중반에 가장이 된 아빠에게 '꿈'이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여느 날처럼 아빠는 오토바이로 배달 중 혜화동 로터리 고가도로(지금은 지상화 되어 그냥 로터리이다)에서 미끄러져 앞서 가던 버스 아래로 들어갔다. 아빠는 그 순간 가족이 떠오름과 동시에 이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헬맷을 써서 머리 쪽을 크게 다치지 않은 게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고 했다.
긴 여정 끝에 아빠는 개인택시 기사가 되었다. 지저분한 차를 보면 '세수는 하면서 세차는 하지 않는다'라고 혼잣말로 투덜거리시던 아빠. 그 말씀대로 아빠의 택시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났다.
요리사의 꿈을 접었지만, 손님들과 나누는 무수한 대화 속에서 아빠는 또 다른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계셨을 것이다. 아빠의 인생은 마치 서울의 복잡한 도로와 같았다. 때로는 꿈을 포기해야 했고, 때로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길이 우리 가족을 향한 부양과 사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빠의 손재주로 빚어낸 우리 가족의 성장은 어떤 미슐랭 레스토랑의 요리보다도 맛있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