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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난 이작가 Oct 15. 2024

노인을 위한 수영장은 있다

수영에세이 열 번째 이야기 – 매일 새벽, ‘미래의 나’를 마주하며


    새벽에 수영장을 갈 때마다 마주치는 얼굴들이 있다. 6, 70대의 마스터반 수영인들. 그분들은 이 수영장을 다니신 지 십 년 넘은 분들이라 이 수영장의 역사 같은 분들이다. 수영장 사장님이 바뀌고, 얼마나 많은 강사가 거쳐 갔으며, 코로나 시절은 어떻게 넘어갔는지 수영장이 겪은 일들을 빼곡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놀라운 건, 그런 베테랑들이 여전히 그 누구보다 일찍, 그 누구보다 빠짐없이 수영장을 온다는 사실. 그저 매일 아침 식사하듯이 매일 새벽 수영하는 루틴의 삶으로 정착하신 듯싶다. 마스터 반의 나이가 있는 수영인들 몇 분을 빼면, 새벽 수영 모든 반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고 극소수의 노령 인구가 있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 자유 수영을 가면 이 비율은 반전되는데, 타임에 상관없이 자유 수영을 오기 때문에 어느 레인에나 나이 드신 분들이 상당히 많다. 수영이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아 의사들이 많이 추천하는 운동 중 하나라는데, 그래서인가 다른 타임에는 내 예상보다 더 많은 노령층이 수영장을 다니는 것으로 예상된다. 자유 수영 초급 레인은 50%를 넘을 때도 종종 있고, 가끔은 80대 수영인들이 섬처럼 여기저기 떠서 부유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내가 17년 전에 수영장을 다녔을 당시를 곱씹어보면, 나이 든 수영인들에 대해 어떤 관심도 없었다. 너무 일상이 바빴고, 나와는 꽤 동떨어진 나이였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그때는 수영복도 달랑 두 개였고, 모임도 많아 수영장을 그리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으며, 수영을 마치면 직장 출근하기에 바빴기에 수영장 이모저모에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뭐라도 운동 하나 하면 좋을 거라는 동료 말에 혹해, 직장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있는 수영장을 다녔다. 그런데 이제는 수영을 꾸준히 하리라 마음도 먹었고, 수친들과 수다도 떨 정도로 수영장 커뮤니티 안에 안착했으며, 나이도 노인으로 가는 문턱에 가까워지다 보니 유독 ‘나이 든’ 수영인들에 눈이 간다. 그래서 처음 보는 얼굴에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고, 말을 붙이곤 하는데, 노령의 수영인들 특징은 하나같이 인사와 수다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 간혹 젊은 수영인들은 갑작스러운 말 붙임을 불편해하거나, 선 넘는 관심은 참아주길 바라는 뉘앙스를 전달할 때도 있다. 여기에서 젊음과 늙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애매하긴 하나, 젊은 수영인은 대략 2, 30대를, 늙은 수영인은 60대 이상으로 퉁 치려 한다. 나의 관찰치가 일반화의 오류로 번질 수 있겠지만, 수영장에선 분명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더 많이 참견하며, 더 자주 수다를 떤다. 그런데 이런 개방성은 연륜에서 오는 유연함이라기보다 외로움에서 기인한다는 게, 아니 외로움과 서러움을 통과했기에 가능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해석이지만.          



    오래전, 수영할 때는 외롭다거나 서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수영 배우는 속도도 나쁘지 않았고, 강사님이 해보라는 동작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번 무호흡 한번 호흡으로 자유형을 가라 하면, 젠체하려는 듯 두 번 무호흡 한번 호흡으로도 갔다. 그리고 나이 드신 분들은 밑도 끝도 없이 젊다는 이유 하나로 자리를 양보하며 내 자리를 앞으로 옮겼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 모든 게 달라졌다. 수영 배우는 속도도 더디고, 강사님이 해보라는 동작은 되는 것이 거의 없다. 한번 무호흡 한번 호흡으로 자유형을 가라 하면, 매번 호흡하며 가도 레인 끝에서 전력 질주한 러너처럼 헉헉댄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밑도 끝도 없이 젊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어떤 강사님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이 든 사람을 홀대하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어떤 수영인은 나이 든 사람의 더딤을 견디기 힘들어하기도 한다. 외롭고 서럽다. 그래서인지 내 시절이 다 가버린 것 같은 서러움을 아주 자주 느낀다. 청둥오리처럼 여유 있게 수영하는 풍경인데, 내 서러움은 마음속에서 한없이 물갈퀴 질을 해대는 것이다. 아무도 주지 않은 서러움을 혼자 받아 안고 끙끙대는 형국.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물속에 넣어놓고 허우적대며 중심에서 점점 배제되는 서러움을 감지하는 날이 잦아지니, 나의 늙어감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한없이 ‘나이 든’ 수영인들에 대한 이해가 커져 간다. 불쑥불쑥 들어오는 그들의 참견은 진심을 담은 서툰 표현임이 이해되고, 젊은 사람들과의 비교는 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큰 차이를 절감했기 때문이고, 강사님이 주문한 동작에 상관없이 마이웨이를 택한 영법은 주제 파악이 끝난 최선의 처사였음을. 그리고 내 나이를 관통해 ‘노령 인구’ 영역으로 들어가면 이 모든 외로움과 서러움을 초월하고, 넉살과 수다로 수영장을 물들이며 그저 즐겁게 물놀이 같은 운동으로 건강을 챙기는 여유를 장착하게 됨을.      



    어쩌면 나는 노인이 되기 전, 제2의 사춘기 시절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기 전 아이들의 사춘기처럼 모든 게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카오스 상태. 그래서 외로움과 서러움의 농도가 짙은 지도.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모든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갈 것이고, 어느새 누가 봐도 ‘늙은 수영인’으로 보일 날이 올 것이다. 물론 계속 수영을 한다면. 하나, 이제는 너무 서러워하지 않으련다. 새벽마다 마주치는 마스터반의 나이 든 수영인들처럼 꾸준히 수영해서, 아침 식사처럼 새벽 수영이 일상이 되는, 씩씩한 수영인으로 나아가길 소망하기로. 그리고 노인이 많은 수영장에 감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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