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에세이 스물한 번째 이야기 – 급기야 50m 수영장으로 원정 수영까
연말이면 해운대든 경포대든 바다 위 일출을 감상하며 한 해를 정리하는 리추얼이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례행사를 감행하기 위해 숙소를 물색했다. 늘 가던 부산, 강릉, 속초 말고 고성이나 삼척은 어떨까?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안 가본 바닷가 근처 호텔이나 넓은 욕조를 담은 근사한 펜션이 아닌, 50m 수영장에 눈이 묶였다. 다른 곳을 가볼까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또다시 강릉으로 덜컥 예약을 마쳤다. 김정호처럼 지도까지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간, 강릉. 그 강릉에 아레나 수영장이 있었다. 안목해변, 강문해변, 경포해변이 있는 건 알았어도, 오죽헌이나 선교장이 있는 건 알았어도, 강릉에 멋진 수영장이 있다는 건, 수영인이 되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강릉시에서 2018년 평창 올림픽 쇼트트랙과 피겨 종목 경기장이었던 곳에 2022년 85억을 들여 실내수영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50m, 8개 레인, 수심 1.4m, 천장 높음, 밝고 환하고 넓음, 수질 좋음, 자유 수영을 다녀온 사람들 후기는 칭찬을 넘어 찬양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안 가볼 이유가 없었다. 바닷가를 가는 목적이 무색해질 만큼 강릉까지 원정 수영을 간다는 사실에 경도되었다. 어떤 수영복, 수모, 수경을 쓸까? 25m에서만 하다가 50m를 쉬지 않고 갈 수 있을까? 수영을 못하는 동거인도 풀에 데리고 들어가야 할까? 월요일 휴관을 빼고 매일 갈까? 아침에 갈까, 저녁에 갈까?
수영장은 기대만큼 좋았다. 토요일 저녁이라 사람이 없어, 샤워실이나 풀은 여유가 넘쳐흘렀고, 사천 원으로 그 넓고 높고 쾌적한 수영장을 통으로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입수하기 전, 샤워만 하는데도 괜한 뿌듯함이 올라와 자못 흥분됐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도장 깨기로 어떤 상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내가 드디어 원정 수영을 감행했다는 것이 뭔가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진정한 수영인으로 거듭나는 듯한 과잉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50m를 쉼 없이 헤엄쳐 간 후, 아드레날린이 나대기 시작했다. 4시간 운전을 마치고, 숙소에 짐을 푼 후, 저녁도 거른 채 달려왔으니, 수영 실력은 차치하고 열정만큼은 인정받은 셈. 그런데 우려와 달리 50m를 수영할 수 있다니, 스스로가 여간 기특한 게 아니었다.
나이키 신상 수모에, 신상 수영복, 그리고 무늬로 수영 선수를 방불케 하는 스피도 수경을 써 수영 고수 느낌을 팍팍 풍겼다. 덤으로 수영용 MP3 이어폰까지 착용하고 음악을 고르는 여유 있는 자세까지. 그곳엔 나의 진짜 실력을 아는 수친인들이 없으니까. 새벽마다 일찍 가 맨 앞에서 체조를 마쳐도 뒤로 뒤로 밀려 꽁무니에 따라붙는 설움을 아는 이가 없으니까. 물론 물 위에 떠서 팔을 몇 번 저으면 실력은 금방 들통나지만, 누구나 남들에겐 큰 관심이 없으니, 난 판단하는 눈들이 제거된 곳에, 나만의 착각을 심어 두고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50m를 왕복했다. 25m에 둘러있는 옆 레인의 가벽을 지나치고, 45m의 깃발을 지나쳐 바닥의 진한 ‘T’가 눈에 들어오면, 마치 운동회 달리기 대회 결승점을 본 마지막 주자처럼 벅찬 느낌이 밀려왔다. 그렇게 50여 분, 자아도취 원정 수영을 마쳤다.
체격도 체력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그 어느 스포츠도 관심 안에 둔 적이 없었기에, 이런 일련의 수영에 대한 열정과 끈기는 나에게조차 낯설다. 어느 날 수영이 내 삶에 성큼성큼 들어와 중앙 자리를 꿰차고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느낌. 때론 하루 계획, 여행 일정, 병원 진료를 계산할 때도 수영을 나란히 놓고 손가락을 헤아린다. 놀라운 건, 제일 빨리 밀쳐둬도 무방한 수영이 의외로 쉽게 제쳐지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수영 바다에 풍덩 빠져 기쁜 마음으로 허우적대고 있다.
50m 수영장을 섭렵하고, 동시에 원정 수영까지 경험하고 나니, 보이지 않는 수영인 클럽에 제대로 입성한 듯싶다. 이제는 별 고민 없이 더 열정을 불태워도 되겠다. 호텔을 가도 해외를 가도, 수영장 유무를 따지는 유난을 떨어봐야겠다. 실력이 크게 늘진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늘어 어느새 50m를 갈 줄 알게 되었으니. 끈을 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어딜 가도 뒤처지지 않는 수영 실력이 되지 않을까? 무늬만 고수가 아닌 진정한 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