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희 Nov 30. 2023

시간이 만들어 내는 텃세

딸은 엄마 인생을 닮는다고? - 9

 아이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리는 증조할머니를 향해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다가가 품에 안기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 TV 밑 바구니 속에서 아껴두었던 사탕을 꺼내주시곤 했다.

할머니의 말을 못 알아 드는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할머니의 말을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건지 적절한 타이밍에  "네" "아니요" "감사합니다"는 대답을 했다. 소리 내어 웃으시는 법이 없었던 할머니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본 할머니의 모습 중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행복한 미소였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핸드폰 사진 속 할머니의 모습도 참 많이 변했다. 처음에는  멋 내기 갈색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까만 먹물 염색으로 검디 검은 머리색을 유지하셨지만 이제는 염색을 끊고 100% 자연 백발을 고수하고 계신다.  

머리색만큼이나 우리를 배웅하는 모습도 많이 달라지셨다.

예전에는 대문까지 걸어 나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다. 물론 격하게 흔들지는 않으셨지만 '손을 흔들고 계시구나'는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몇 해가 지나니 대문까지 나오긴 하셨지만 서 있기가 힘드신지 대문 턱에 걸터앉아 우리의 뒷모습을 지켜보셨고 백발이 된 이후로는 대문까지 나오시는 것도 힘들어 툇마루에 앉아 '빨리 가라'라고 손짓하셨다. 


변하는 건 사람뿐이 아니었다. 할머니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주민센터와 농협이 있는 이 마을의 최대 번화가가 나온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허름한 간판들에 한번 놀라고 어느 가게를 들어가든 실패가 없는 내공 100단의 숨은 맛집들에 두번 놀랐다.  

제주도에 내려오는 첫날 꼭 먹었던 음식은 다름 아닌 통닭이었다. '육지에서도 흔하게 먹는 통닭을 왜 거기서 먹냐' 하겠지만 바삭함과 부드러움이 뭐가 달라고 달라서 우리 가족의 원픽이었다. 

도로보다 반층 정도 내려간 고기 국숫집도 맛이 훌륭했고 '빅사이즈 버거' 현수막이 걸려있던 햄버거 집에서는 거대 햄버거를 주문하면 피자처럼 8조각으로 나눠진 버거가 테이블에 놓였다. 한 조각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의 크기였고 맛도 정말 좋았다. 


이 동네에 관광객이 점점 늘어나면서 낮은 건물들을 부수고 높은 건물들이 세워졌고 현지인들이 운영하던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애정하던 가게들이 하나하나 없어졌고 그 자리는 체인 업체들이 채워갔다. 

현지 맛집들이 모두 없어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꽤나 유명했던 칼국수 집 자리가 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이 항상 줄 서 있었는데 여기도 문 닫았나 보네' 했는데 사실은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생존 소식에 반가운 마음도 잠시였고 7000원이었던 가격이 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으로 변한 메뉴판을 보며 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런 변화의 좋은 점은 작은 마을에 정말 다양한 가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엄마 문어파스타 먹자" 

아이들이 가게 앞에 놓인 메뉴판을 보며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따뜻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주방에서 사장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우리를 응대해 주었다.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장님을 보며 남편이 물었다

"혹시 저기 위에서 **가게 사장님 아니세요?"

"네 맞아요. 그 가게는 다른 사람하고 같이 운영했었어요. 거기 없어지고 혼자 하려고 이곳으로 내려왔어요."

"거기서 사장님을 뵌 적이 있는 거 같아서 여쭤봤어요"

사장님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셨고 어제 만난 사람도 까먹는 나는 남편의 눈썰미와 기억력에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연신 감탄했다.

우리가 먹는 동안에 더 이상 손님은 들어오지 않았고 사장님도 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마감시간이 몇 시예요? " 혹시 우리 때문에 가게문을 못 닫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급해져서 질문을 했다.

"문 닫는 시간 많이 남았으니 편히 드세요"

"네"

.

.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술 한잔 하시겠어요?"

남편의 말에 사장님도 싫지 않으셨는지 슬쩍 잔을 들고 오셨다. 우리 애들을 쓱 보시더니 사장님도 같은 또래의 아이가 둘 있다고 했다. 

"제주도 분이세요?"

"아니오. 육지에서 왔어요. 제주도 다른 지역에서 장사하다가 이 동네에 터 잡은 지는 쫌 됐어요 "

"사람들이 제주도가 텃세가 심하다고 하던데 진짜예요?"

"텃세요? 여기 계속 살았던 사람들은 텃세 안 부려요. 제가 처음에 이사 왔을 때 육지 사람 내려왔다고 동네 사람들이 잘해줬어요. 대부분 다 잘해주시는데 그 와중에 먼저 내려와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 새로 내려온 사람들한테 텃세부리더군요."

깜짝 놀랐다.  당연히 원래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을 경계하는지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사장님께서 몰랐던 동네이야기를 들려주어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셨네요." 인사하며 자리를 떠났고 우리는 다음날도 문어가게에 찾아갔다.  


새로운 가게들이 생기는 것이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처럼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시간이 변하니 사람의 모습도 마을의 모습도 변해간다. 나도 따라 변해간다.  

이전 08화 내가 제주도 결혼식에 가면 안 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