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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Dec 19. 2023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듣고 싶어

딸은 엄마 인생을 닮는다고? - 14

"시간 오래 안 끌고 잘 죽었지. 잘 죽었어. 안 죽었으면 아마 내가 죽었을 거야."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지났지만 시아버님은 할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자식을 버리고 시집을 왜 가?"


제주 4.3 사건이 한창 일 때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로 어린 시아버지는 엄마 곁을 떠나 큰집으로 보내졌고 시할머니는 재가를 하셨다. 

시아버지는 매일 똥지개를 메고 시키는 일만 하였고 큰집 형들이 학교 가는 뒷모습을 바라만 봐야 하는 몸종과 다름없는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들은 구박을 넘어 괴롭힘으로 이어 진적도 많았으나 힘들어도 엄마에게 연락할 길도, 찾아갈 수도 없으니 큰 집에서 먹는 눈칫밥도 밥이라서 고마울지경이었다.


시아버지의 힘든 생활은 고스란히 할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17세가 되었을 때 제주를 떠나 육지로 갔다. 서울에 가면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무작정 부산에서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서울역에서 오니 갈 곳도 반겨주는 이도 없었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다. 

우연히 숙식이 제공되는 이발소를 알게 되어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는 사장님이라서 고마웠으나 몇 달 먼저 들어와 일하고 있는 직원이 문제였다. 사장이 안 보이는 곳에서 매일 때리고 구타했다.

'이러다가 여기서 맞아 죽겠구나' 싶은 순간에 앞 뒤 없이 무작정 뛰어나와 다시 길 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아이에게 다가와 일을 제안하는 사람은 많았다.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이 아저씨가 시키는 일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기댈 어른 한 명 없는 서울은 무섭고 차가웠다. 

길에서 혼자 잠을 자다가 이상한 사람에게 해코지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은 후로는 밤이 오는 게 무서웠다. 누군가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그곳은 밤이 되면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만큼은 마음이 편해져 잠을 청할 수 있었다.  


20살이 넘어 엄마를 다시 만났다. 

"미안하다" 말을 기대하며 한달음에 달려간 시아버지의 마음과 달리 시할머니는 여전히 무뚝뚝했고 아들에게 마음 한구석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배신감과 함께 마음속 응어리는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진짜 미우면 다시는 안 보고 살면 그만 일 텐데, 애증도 사랑이라서 철새처럼 때가 되면 제주도를 찾아가셨다. 싸우고 소리 질러도 내 엄마고 내 피붙이라서 끊어지지 않는 듯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가한 엄마(김혜자역)와 엄마와 같이 그 집에 들어간 이동석(이병헌 역). 엄마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의붓형들의 괴롭힘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이동석도 평생 엄마에 대한 미움을 안고 살다가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여행에서 엄마에게 진심을 물어본다.

이동석 :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나한테 미안한 게 없냐? 그때 나한테 아무도 없었는데 아방도 누이도 다 죽고 엄마뿐이었는데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나한테 그래 놓고 미안한 게 없어? 어떻게 나한테 미안한 게 없어.

엄마: 미친년이.. 어떻게 미안한 걸 알아? 니 어멍은 미친년이라.. 그저 자식이 세끼 밥만 먹으면 사는 줄 알고, 자식이 쳐 맞는 걸 보고도 멀뚱멀뚱.. 개가 물어뜯은 년..


시할머니와 시아버지가 이런 대화를 한 번이라도 나누었다면 할머니의 죽음 뒤까지 아버님의 원망과 미움이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 대화의 방법을 몰랐고 아껴주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시할머니께서 하늘에 잘 도착하셨다면 시아버지 꿈에라도 잠시 와서 말해주셨으면 좋겠다.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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