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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Dec 12. 2023

내 능력의 시작점

딸은 엄마 인생을 닮는다고? - 12

내 아이들에게 제주도 할머니가 증조할머니이듯 나에게도 증조할머니가 계셨다.

김소례 할머니

1900년 초반에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세련되었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할 때 아빠가 준비한 가장 큰 결혼 선물은 바로 할머니였다.

총각 시절의 아빠는 김소례 할머니와 함께 살지 않았는데 결혼 후 신혼집에 김소례 할머니를 모셔와 엄마에게 떠밀듯이 안겨드렸다. 엄마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도 아니고 시할머니를 모시고 신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김소례 할머니는 이름과 맞지 않게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심보를 가진 분이었던 게 틀림없다. 엄마가 보건소에서 오빠를 낳은 당일에 아직 눈도 못 뜬 아기를 안고 집으로 왔고 할머니는 집에 들어서는 엄마를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내 뱉었다. 

"배고프다. 밥 차려라"

텅 빈 냄비와 텅빈 밥통에 당황하며 아기를 내려놓고 쌀을 씻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집주인아주머니가 미역국을 한 솥 가득 끓여 가져다주었고 엄마는 그때의 고마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나이가 24살이었다.


오빠가 돌이 될 무렵, 아빠는 사우디에 건설 노동자로 파견을 나갔고 몇 달에 한번 한국에 와야 가족들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잠깐 한국에 와있던 동안에 엄마 뱃속에 내가 생겼고 사우디로 돌아간 아빠는 엄마의 임신 소식을 듣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사이다를 돌렸다고 한다. 

하지만 김소례 할머니는 달랐다.  동네방네를 다니며 남편도 없는데 임신을 했다고 애비가 누구냐며 떠들고 다녔고 엄마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나 고개를 돌려 피눈물을 흘렸다. 동네 사람들은 김소례 할머니보다 엄마를 더 믿었기에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몇 해 뒤에 드디어 우리 집을 장만하였다. 마당 한쪽에 화장실과 큰 화단이 있었는데 화단 안에 굵고 큰 장미나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미는 나무가 아니라 줄기 식물이라는 반전이다. 

봄이 되어 만개한 장미꽃에 화단 뒤 담벼락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으로 미루어 보아 어린 내 눈에 많은 장미 줄기가 서로서로 얽혀서 나무처럼 보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밤이 되면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장미 덩굴을 비추어 김소례 할머니 창에 한 폭의 동양화처럼 드리워진다. 

할머니의 방은 문과 창문이 따로 있지 않고 한쪽 벽 전체가 나무 격자틀에 한지가 발라진 전통 한옥 여닫이문이었다. 

"귀신이 날 잡으로 왔다"

밤만 되는 누워서 지팡이로 문과 벽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였다. 그게 치매의 시작이었던 듯싶다. 

 증세가 더 심해지는 날이면 방 안에서 볼일을 보고 벽에 바르기도 하셨다. [벽에 똥칠]을 몸소 실천하셨다.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라고 말하는데  똥칠한 모습을 생생 리얼 라이브로 직관한 나로서는 그 말에 웃을 수만은 없다. 


온몸에 똥 칠갑을 한 증조할머니를 엄마는 힘겹게  빨간 고무다라에 앉혔다

가장 큰 냄비에 한통 가득 물을 끓여 놓고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어 목욕을 시켜드렸다. 엄마보다 무거운 할머니는 씻기는 내내 온몸에 힘을 빼고 엄마에게 기대어 있었고  할머니 무게에 이기고 못하고 엄마가 옆으로 넘어지기 라도 하면 같이 넘어진 할머니는 

"엉덩이 깨진다 이년아!"

되려 큰소리치셨다. 

그 모습을 본 어린 나는 치매 있는 어른이 있는 집에는 절대 시집을 가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할머니를 목욕시킨 날에는 힘도 다 빠지고 비위도 상해서 2-3일은 밥도 못 먹고 헛구역질만 했다고 한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본 아빠는 '왜 밥을 안 먹냐..' '밥을 안 먹으니 자꾸 아픈 거다'라는 말로 남의 속을 더 박박 긁어놓았다.  


나는 김소례 할머니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본 것 같다. 그것도 한밤중에 말이다. 자다가 일어나면 내 발 밑에  앉아 계셨고 어느 날은 내 머리 위에 앉아 계셨다.  어느 날은 땋은 머리를 옆으로 늘어뜨리고, 어느 날은 땋았던 머리마저 길게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신기한 건 비몽사몽 선 잠에서 깬 아이가 까만 형체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할머니가 앉아 계시구나'하며 다시 잠에 빠지는 의연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내공은 이렇게 반복학습으로 다져지는 것이다. 

제주도 할머니가 과일을 던졌을 때도 남편보다 내가 차분히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치매 관련한 선행학습 덕분이었을까?


하루는 김소례 할머니가 큰아버지를 붙들고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저년이 나를 밥도 안 주고 굶긴다"

큰아버지도 엄마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의심의 눈빛은 숨기지 않았다.

엄마의 섭섭한 마음은 누가 헤아릴 수 있겠냐 싶었지만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한참이 흐른 뒤에 큰 아버지는 치매를 앓는 장모님을 모시게 되었고 우리 집에 찾아와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내가 겪어보니 다 알겠더라며 엄마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셨다.


김소례 할머니께서 하늘로 돌아가신 건 오빠가 5학년, 내가 3학년때의 일이다. 

제주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첫째가  5학년, 작은애 3학년때의 일이니 나와 아이들의 평행 이론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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