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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Nov 22. 2023

나랑 눈 마주친 거 같은데

딸은 엄마 인생을 닮는다고? - 6

  처음 시할머니 댁에 갔던 날이 기억난다. 비행기에서 렌터카로 환승을 하고 큰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살짝 열어 육지와는 다른 공기를 깊이 들이 마시고 주변 경치도 보며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나는 신이 나기보다는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시할머니 댁에 간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차 안에는 시아버지가 같이 타고 계셨기 때문이다. 남편이 운전대를 잡고 조수석에는 시아버지가 앉으셨다. 난 뒷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분 정도 달린 후에 큰길을 벗어나 이면 도로로 접어들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음을 느끼고 가방을 뒤적여 거울을 찾아 얼굴을 살펴보았다.  

길은 점점 좁아졌고 굽이굽이 언덕길을 조금 더 올라갔다.  '이런 길에서 다른 차랑 마주치면 어떻게 비켜 줘야 하지?' 생각하며 담벼락에 차가 긁힐까봐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밖을 보았다.


내비게이션은 작은 공터로 우리를 안내했고 그곳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영주차장인 것 같았다.  5-6대 정도 주차할 수 있어 보였는데 그날은 파란색 용달 한 대만 주차되어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으로 만든 낮은 돌담이 제주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시아버지는 벌써 저만치 앞으로 걸어가고 계셨다. 행여나 놓칠세라 서둘러 시아버지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10m 정도 걸어가다 주황색 대문과 주황색 박공지붕을 가진 전형적인 제주도 옛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대문은 슬쩍 밀어보니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살짝 열리다가 말았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대문을 활짝 열었다. 

대문에서  딱 세 걸음이면 마당을 지나 거실과 연결된 툇마루에  발끝이 닿았다. 그곳에 앉아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갔다. 집의 천정은 173cm인 남편이 고개를 살짝 숙일 정도로 낮았다. 나는 점프만 하지 않는다면 똑바로 서서 걸어도 괜찮은데 왠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시할머니께 큰절을 올리고 아버님과 할머니, 남편까지 넷이서 서로 마주 보며 동그랗게 앉았다. 모두 입에 풀이라도 바른 듯이 그 누구도 말 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스윽스윽' '도옥도옥'


어디선가 매우 작은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눈동자만 돌려 주변을 살펴보다가 살짝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바닥을 짚고 있는 내 손과 15c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손가락 두 개 합친 것만 할 바퀴벌레 (과장 아님! 진짜 엄청 컷다)가 기어가고.. 아니  걸어가고 있었다. 기어간다고 표현하기에는 그 모습이 너무 위풍당당했다.

저벅. 저벅. 저벅.

여유롭게 걷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틀림없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며 순간 '헉'하는 소리가 올라왔지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놀란 와중에도 지금은 호들갑을 떨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이 본능을 지배했다.


한참 동안 나를 보던 바퀴벌레는 더듬이를 까딱까딱하더니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 바퀴벌레의 목소리가 들렸다면 아마도 나에게 "왔냐?"라는 말을 했을 것 같다.

네가 이 집의 터줏대감이구나! 내가 몰라봤네.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런데 자주 마주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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