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빌런은 나다.

by 김소희

출석수업을 마치고 잰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스크린 도어 너머로 지하철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기도한다.

'제발 제발 제발 빈자리가 있어라. 제발...... 아싸!'

운 좋게도 빈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책가방을 벗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맞은편에 본듯한 얼굴이 앉아있다.

아마도 오늘 수업을 같이 들었거나 아니면 같은 층에서 수업을 들은 사람인 것 같다.

그도 얼굴이 지친 듯 보였다. 나처럼.

가방에서 주섬주섬 프린트를 꺼내 들었다.

놀랍게도 3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수업을 3과목 들었는데 어쩜 어쩜 3과목 다 과제를 주시는지 감사해서 미춰~ 버릴 지경이다.

지난주 끝났는지 알았던 과제를 또 시작이라니!

'시시포스가 위를 올릴 때 이런 기분인가?' 하는 이상한 공감이 생기기도 했다.

과제를 밀어 올려놓으면 또 과제가 생기고 자꾸 과제가 생긴다.


중간평가는 과제와 출석수업으로 나눠진지 알았다.

실제로는 과제제출과 출석수업 후 과제 제출로 나눠져 있었다.


출석수업에서 받은 과제는 수업 후 7일 후 마감이라는 시간이 딱 정해져 있다.

처음에는 마감일이 멀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해보니 은근 촉박했다.

A과목은 문제마다 답과 관련한 강의 영상을 캡처하여 첨부해야 했다.

필기한 부분을 참고하여 문제를 풀어나갔다. 해당 영상을 찾으며 한번 더 답을 확인하고 캡처했다.

'오호! 문제를 풀며 이렇게 복습도 하라는 거였네~'

교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며 우쭐우쭐했다.

1번 문제에서는 하나, 두 개의 사진을 첨부하더니 3번 4번 문제로 넘어 갈수록 여러 개를 캡처했다.

더 문제 풀이에 딱 들어맞는 부분을 캡처하고 싶은 욕심이 났다.

이러면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마음속에는 다음 과제도 빨리 시작해야 하는 부담도 끌어안고 있었다.


- 가장 큰 빌런은 나다.


어떻게 다 잘하냐. 적당히 해라.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하며 나의 세포들이 아우성이다.

"내가 알잖아. 내가. 누가 안 알아줘도 내가 알잖아. 그거면 됐지."

5시에 일어나 어제와 똑같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나에게 하는 말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고 최면이라면 최면이었다.


3과목 제출까지 5일 정도 걸렸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되려나? 나도 잘 모르겠다.

업무 중에, 일과 중에 틈틈이 노트북을 들여다 보고 교과서를 펼쳤으니 정확한 시간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건 세끼 꼬박 챙겨 먹고 밥심으로 사는 내가 먹는 시간을 줄였다는 게 핵심이다.

아마 누군가는 하루 이틀 꼬박 할 수 있는 시간일 테고 누군가는 나보다 더 긴~ 날짜 동안 노력해야 하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

같은 과 학우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만날 일도 없겠지만 다들 나보다 더 열정을 쏟고 있으리라.

나는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한다.

방송대 편입하고 나서 부쩍 눈이 침침해졌다. - 노안이 생길 나이라는 건 비밀이다. 쉿!

졸업까지 아직 멀었으니 오늘도 잊지 않고 루테인은 챙겨 먹어야겠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21화떨리는 첫 출석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