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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터 바른 토스트 Dec 01. 2023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어쩌면 끝이 뻔한 이야기 :: 네 번째

오늘도 역시 이른 출근을 마친 후, '연애하다가 현타가 제대로 오는 순간.' 이라는 재미있는 아티클을 읽었다. 직장생활은 연애와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공감 가는 몇 가지 내용들이 있었다.


'나 자신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

'갈수록 연락이 잘 안 될 때'


그리고,


'관계의 발전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





설렘을 가득 안고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시작한 회사 생활이었다. 이직을 하며 올린 연봉에 꽤 만족하고 있었고, 어쩌면 인생의 멘토가 될 수도 있었던 좋은 사수(이하 A 사수라 하겠다.)를 만나 정말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주말을 보내고 맞이하는 월요일이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기업 문화도 수직적이거나 딱딱하지 않았고, 업무에 대한 피드백도 즉각 즉각 이뤄져 보람과 성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꽤 오래 다닐 수 있는, 괜찮은 회사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계획,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공유가 없었다. 현재 상황에 대한 공유도 팀장급들 사이에서만 오가며 쉬쉬하기에 바빴다. 답답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팀장님들이 아닌 대표님이 앞서 소통을 해주시길 바랐다.


어느 날, 퇴근 전 A 사수가 나를 불러내어 잠시 티타임을 갖자고 하셨다. 원온원 미팅을 진행하는 줄 알고, 서둘러 노트북을 챙겨드는 나에게 A 사수는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 거니 편하게 회의실로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신사옥 회의실은 환기가 잘 되지 않아 갑갑한 공기가 맴돌았고, '무슨 이야기를 꺼내실까'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회의실에 들어갔다. A 사수는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쁘죠?' 라는 말로 대화의 서두를 여셨다. 당시 A 사수는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에 대해 굉장히 힘을 쓰고 계셨다. 아마도 나와 대화를 하기 전, A 사수는 그 두 가지 안건을 가지고 대표님과 기나긴 미팅을 마치신 것 같았다.




A 사수는 뭔가 상처 받은 듯 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혹시 지금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에 대해 편하게 말해줄 수 있나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저는, 지금 저희 회사가 선원들과 항해사는 있는데, 선장과 조타수가 없는 배를 탄 느낌이에요. 결정된 항로도 없고, 키 조작도 하는 사람도 없어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하는 것 같아요. 아니다. 결국 헤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연인사이 같네요."



A 사수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단 번에 뭔가 캐치해 냈다는 듯 정말 좋은 비유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A 사수는 얼마가지 않아 퇴사를 결정했고, 나에게 괜찮다면 본인의 회사로 오라는 제안을 해주며 짧게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나는 당시 나눴던 A 사수와의 대화에서도 회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팀원들 마다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있던 문제들.


관계의 발전을 위해 대화를 하고, 비언어적 소통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팀장들이 사원들과 한 명씩 티타임을 갖기도 했고, 회식이 아예 없던 회사에서 이례적으로 전체 회식을 갖기도 했었다. 이겨낼 수 있으리라, 권태기는 길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그때는 적어도 월급은 밀리지 않았으니, 사원들끼리 퇴근 후 술자리를 가지며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도 대표님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by playground AI


어느 날부터 방 안의 코끼리가 들어왔다. 뭔가 잘못되었고, 문제들이 뻔하게 눈앞에 보였지만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코끼리를 커다랗게 키워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는 단절되었고, 서로의 감정을 모르는 척 하기 시작했다. 방 안의 코끼리는 지금 어마무시한 크기로 사무실을 차지했다. 어느 누구도 코끼리의 'ㅋ'자도 꺼내지 않는다.


얼마 전 밀리기 시작한 월급을 감당할 수 없어, 대표님을 찾아갔었다. 멋적어하시며 정말 미안하고 남아 있어 줘서 고맙다는 그의 말을 뒤로하고, 밀린 월급이 언제쯤 처리될 수 있는지 정확한 날짜를 말해달라고 했다. 대략적인 일자.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또다시 언제 처리될지 모르는 월급. 갑자기 장황하게 늘어놓는 대표님의 사업 이야기에 정작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표님마저 방 안의 코끼리를 피하고 있다. 오랫동안 무시된 코끼리의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방 안에 들어차있는 코끼리를 무시할 수가 없다.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발전이 없는 관계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다. 회사에선 적어도 12월 이내에는 결정을 내리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결정이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마도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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