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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터 바른 토스트 Dec 05. 2023

글쎄요, 제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끝이 뻔한 이야기 :: 여섯 번째

아침 일찍부터 채용공고를 뒤적거리고, 가족들과 카톡을 통해 언제쯤 퇴사를 통보하는 것이 나을지 고민하던 날이었다. 임금체불, 노동부 신고 절차, 간이대지급금 신청 방법 등을 검색하며 필요한 서류들을 정리했다. 퇴사부터 밀린 월급과 퇴직금, 4대 보험 처리까지 머릿속으로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나머지 잔금은 못 받은 돈이 되려나' 생각하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얼마 남지 않은 직원들 중 유일한 여자인 나. 저마다의 살길을 찾아 떠난 직원들이 모두 떠나가 버린 후, 점심시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곤욕스러운 시간이 됐다. 밥을 천천히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순식간에 식사를 끝내버리는 직원들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아직 더 먹을 수 있는데도 숟가락을 내려놓는 때가 많았다. 부족하게 채운 점심식사는 금세 배고픔을 가져다주기 일쑤였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직원들의 식사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급하게 밥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월급이 밀린 이후부터 직원들은 점심시간에 가벼운 수다를 나누거나, 웃는 일이 일절 없어졌다. 침묵 속에서 욱여넣은 점심밥이 소화가 되지 않는 참이었다. 





Slack을 통해 인사팀 팀장님께서 회의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하자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아침부터 심정이 복잡하던 차에 훅 들어온 대화 신청은 긴장감을 일으켰다. 지난번 체불근로자 생계비 융자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며 이런저런 고민과 함께 팀장님께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도 얻었었다.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해고통보를 하시려는 걸까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팀장님께선 내가 걱정되어 대화를 하자고 하신 거라고 하셨다. 생계비 융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신용등급에는 영향이 가지 않는지 등을 차분하게 묻던 내가 떠오르셨단다. 화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고, 사실은 그게 맞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화를 냈어야 할까? 사실 나는 그 당시 아무 느낌이 없었다. 나름대로 회사에서 짜내고 짜낸 대안 중 하나였을 거고, 마법처럼 밀린 월급을 한 번에 해결할 만큼의 대안도 없는 상황이니 그러려니 했다. (뒤늦게 어처구니가 없어지긴 했지만..) 나는 팀장님께 정말 솔직한 심경을 털어놔도 되냐 묻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오늘 아침부터 퇴사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고, 간이대지급금을 받기 위한 절차 등을 찾아보고 있었다고. 그동안 밀린 월급과 2년 차가 되어 받을 수 있는 퇴직금 등을 대략적으로 계산해 보시던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회사에 출근해 난방을 하고, 컴퓨터를 켜 전기세를 쓰고, 점심을 제공하는 회사의 식대를 쓰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의 말에 어느정도 공감을 해주시던 팀장님은 만약 퇴사를 한다면 실업급여, 간이대지급금 등 여러 절차를 무리 없이 밟아나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답변을 해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팀장님은 12월 말에는 결정이나도 날 거라며,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말을 해주셨다. 돈 못주니 배 째라, 신고할 테면 해봐라 하는 악덕 기업의 태도가 아닌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길을 찾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침묵 속에 묵혀있던 회사 안의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왜 지금까지 남아있어요?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해서."


현재 채용시장도 썩 좋지 못한 데다, 아직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 하나 없는 나에겐 객관적으로 보아도 당장의 이직은 힘든 상황임을 전했다. 기적같이 회사에 돈이 생겨 밀린 월급이 해결될 거라는 기대심 반, 그리고 퇴직을 하더라도 깔끔한 상황에서 나가고 싶다는 마음 반. 총 3가지 이유로 아직 회사에 잔류하고 있음을 말했다. 

 

팀장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체불된 임금이 해결된다면, 그래도 이직을 할 것인지 물었다. 월급만 따박따박 나온다면, 나는 UX와 관련된 경력을 더 쌓고 싶어서라도 쉽게 이직할 것 같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올해 안으로 월급이 해결될 거라는 기대심도 이제는 없다는 말도 전했다. 퇴사도 아직은 명확하게 결정 내린 사안도 아니라고. 그렇게 대화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서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마무리됐다. 





우연히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의 영혼을 설명할 단어가 없다.'는 뜻을 가진 인지 정서 장애라고 한다. 나도 모르는 새에 머리에 새치가 가득하도록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뭐라 뚜렷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겠다. 그저 기계적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의 감정을 따라 하거나 공감하는 척할 뿐이다. 


감정이 없는 건 썩 괜찮다. 쓸데없는 감정소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고, 스트레스로 인해 오는 '스트레스성 질병'을 피해 갈 수 있다. 나 정말 힘들고 죽겠다며 울고불고 떼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면 보다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나를 위해서도 좋은 것 같다. 내가 감정표현불능증을 앓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나마 나의 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12월 말까지는 임금체불 회사에 재직하게 될 것 같다. 연말이니만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는 걸 안다. 인생을 살며 처음 겪어 보는 임금체불. 정말 세상에는 별 일이 다 있다는 걸, 나라고 그 별 일을 피해 갈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이 회사와의 마지막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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