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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터 바른 토스트 Nov 29. 2023

EVERY SECOUND COUNTS

어쩌면 끝이 뻔한 이야기 :: 두 번째

공부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성적표들을 보며 고3 담임 선생님과의 기나긴 상담을 통해 일찌감치 사진학과에 수시전형으로 입학했다. '그래도 수능은 봐야겠지.' 라는 생각에 남은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던 국어 문제만 열심히 풀어댔다. 긴장감 넘치는 수능 시험장에서 여유롭게 입장한 나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문제를 풀어내려갔다. 수능이 끝난 다음 날의 교실 분위기는 상당히 심난하고, 고조되어있었다. 한 친구는 원하던 점수가 나오지 않아 재수를 생각한다며 엉엉 울어댔고, 어떤 친구는 생각보다 잘 나온 점수에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대학 진학을 고려하지 않는 몇몇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지 떠들기에 바빴다. 이미 수시 전형으로 대학 입학을 확정지었던 나는, 가채점 후 생각보다 잘 나온 나의 점수와 등급에 조금은 벙쪄했던 것도 같다. 





사진학과에 입학 후 고가의 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몇몇의 동기는 곧바로 자퇴처리를 하거나, 전과를 준비했다. 그다지 여유로운 집안 형편이 아니었던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뚜렷하게 하고 싶은 것도, 목표도 없던 난 '그냥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1학년 1학기를 보냈다. 머리를 쓰는 일은 자신이 없었고, 별 것 아닌 일상들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사진학과가 싫지도 않았기에. 

지금와 돌이켜보면 일찍 전과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술대학이라 그런지, 학기 당 등록금이 상당했다. 1학년 1학기를 마친 이후 나는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국가장학생을 신청했고, 조금이나마 집에 보탬이 되고자 장학금을 받자는 생각으로 사진학 공부와 과제에 매진했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남은 3년 반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등록금은 0원, 오히려 국가장학생으로 근로를 하며 돈을 벌며 차석으로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만큼 열심히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다. 





사진을 전공하고 졸업 후 L 백화점 쇼핑몰 사진 담당 계약직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사진에는 별 흥미도 없었고, 동기들이 들려주는 상업 사진 스튜디오의 열악한 환경이 두려워 조금은 안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백화점 지하층에 짱박혀 브랜드마다 기계적으로 옷을 촬영해 주는 일. 금새 지겨워지고, 오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본사에서 내가 근무하던 지점의 비딩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고, TV에서 경쟁하듯 흘러나오는 고해상도 카메라가 탑재된 스마트폰 광고를 보며 '아, 사진으로는 오래 벌어먹기 힘들 것 같다.' 는 생각으로 곧장 카메라를 팔아버렸다. 그나마 사진 수업을 들으며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정도는 기초적으로 할 수 있었으니, 그쪽으로 발전시켜보자는 쪽으로 그동안 번 돈을 긁어모아 그래픽 학원을 등록했다.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 제작 수업에서 여러 창작물들을 만들어 서울로 취업에 성공했다. In Seoul. 대학이 아닌 취업으로 인서울에 성공한 나는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사람에 치이는 걸 워낙 싫어하는 나는 모든게 다 두렵게만 느껴졌다. 


꽤나 이름 있는 비주얼 콘텐츠 기업에 입사한 첫 날 "안녕하세요." 라는 어색한 인사와 함께 다짜고짜 첫 날부터 일찍 퇴근하기 힘들거라는 말을 들었다. CF 영상 후보정을 하는 팀이었는데, 야근을 밥 먹듯하는 팀원들의 얼굴은 모두 잿빛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신경질적이었고,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출근 3일째 되던 날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집으로 퇴근한지 2주가 넘어간다는 사수의 말에, 나는 곧장 인사팀을 찾아가 퇴사 의사를 전달했다. 서울에서의 첫 취업은 그렇게 3일 만에 종료되었다. 





다음 회사 역시 비주얼 콘텐츠를 제작하는 중소기업이었다. 그나마 퇴근은 할 수 있었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굉장히 친절했다. 그러나 이번엔 회사 대표가 문제였다.


'그렇게 해서는 넌 아무것도 될 수가 없어.' 

'네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만큼, 주말에라도 나와서 공부라도 해.' 

'퇴근하니? 그래, 들어가봐. 나는 여기 있을게.'


퇴근을 해도, 퇴근을 한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말들이 마음 속에 켜켜이 쌓여 체한 것만 같았다.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출근을 했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을 잘해도, 못해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사회초년생이라 그랬는지, 지금이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말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어느 새벽,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하는 집으로 가기 위해 천변을 지나는 다리를 건널 때였다. '이게 우울증인가. 여기서 떨어져 죽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한 겨울이었지만 춥다고 느껴지지도 않았고, 손이 시려운지도 모른 채 다리 난간에 기대어 한참을 최악의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재직한지 1년하고도 이틀 째가 되던 날, 나는 그렇게 두 번째 회사를 퇴사했다. 





세번 째 직장은 법무법인이었고, 영상 편집 업무와 함께 블로그, 유튜브 등의 콘텐츠 마케팅을 맡았다. 일과 사람들 모두 그저 그런 평탄한 회사였다. 그 평탄함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때 쯤, 나는 또 다시 1년 조금 넘게 재직한 법무법인에서 퇴사를 했다. 1년, 1년, 1년. 총 3년을 서로 다른 회사에서 재직했던 나는 이제는 조금 길게 회사를 다녀야겠다는 다짐으로 네 번째 회사로 출근했다. 중소기업 인하우스 마케터로 1년 8개월 가량 재직했는데, 그곳은 또 부장이 문제였다. 가스라이팅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모든 업무의 성과는 부장의 몫이 되었다. 말도 안되는 일로 함께 일하던 과장님을 강제적으로 퇴사시키는 것을 목격한 후, 적지않게 충격을 받았던 난 목표로 잡았던 2년 이상의 경력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지금의 소규모 IT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드라마 The Bear 중 인상 깊었던 장면



이런 저런 환경으로 인해 택했던 나의 선택들에 대해, 후회하는 순간들이 더러있다. 짧은 경력들로 도배되어있는 나의 이력서를 바라보면, '조금만 더 버텨볼걸. 조금만 더 열심히 해볼걸.'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시간들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완전하게 무의미한 시간들은 아니었다고 생각해보려한다.


지금도 나는 선택에 기로에 놓여있다. 조금 더 버텨볼걸 했던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인지, 지금 재직중인 회사에서의 퇴사도 쉽게 결정 내리기가 어렵다. 밀린 월급을 줄 생각이 있긴 한걸까, 싶은 회사에서 퇴사에 대한 고민이라니. 남들이 본다면 코웃음칠 고민이겠다. 


포토그래퍼에서, 모션그래픽 겸 디자이너로, 마케터에서 또 다시 새로운 직무에 관심을 두고 있는 나로서는 이직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설령 퇴사를 하거나, 이직을 하더라도 밀린 월급이 해결되고 깔끔하게 퇴직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그런지 더더욱 멈칫하게 된다. 올해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소식과, 좁디 좁은 취업 시장에 한숨만 내쉴 뿐이다. 


오늘도 무기력하게 출근한 회사는 조용하기만 하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한숨과, 고요함이 슬슬 힘에 부친다. 침묵의 시간이 좋은 소식으로 깨지길 바라기엔,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흘러가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이 중요하다. 허투로 보내는 시간을 최소화 하고, 심연에서 잠수만 하며 가라앉기보다, 손과 발을 움직여 헤엄쳐야 한다. EVERY SECOUND COUNTS. 나의 시간을 누구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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