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수도아가(墨水渡我歌)

by 채선후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기어이 건너시다가

물에 빠져 죽으니

님을 장차 어이할거나 (공무도하가 전문)



요즘 아이들이 미술 시간에 서예를 한다고 먹물 사용이 많아졌다. 서예가 있는 날은 옷부터 티가 난다. 까만 먹물이 몇 군데 묻혀오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 얼굴에 눈이 가기보다 옷부터 쳐다본다. 오늘은 손바닥만 한 먹물 자국을 묻혀왔다. 얼굴부터 좀 더 자세히 훑어보니 열손가락 손톱 끝이 새까맣게 먹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난 한마디 쏴붙였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이게 뭐야?”

“엄마는 나보다 이 옷이 더 중요하지? 잔소리 그만 하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

내가 화를 낸 것은 먹물 때문이 아니었다. 옷에 묻은 먹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워 대야하는 빨래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먹물이 잘 지워지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묻혀 와도 괜찮다. 지워지지 않는 먹물 때문에 팔목이 아프도록 비벼대야 할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화가 난 것이다. 집안일을 해야 되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소심해지는가 보다. 그날 저녁 아이가 벗은 옷을 한참을 비벼댔다.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간의 경험이 영민해진 여우가 되어서일까. 이제는 처음부터 포기를 하면서 문질렀다. 역시나 지워지지 않았다. 벌써 이렇게 아이들과 남편이 남긴 잡다한 흔적을 지워대는 일로 보낸 지 십년이 넘어가고 있다. 지워대는 일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이쯤이면 이젠 뭘 좀 안다고 우겨대도 지지 않을 만큼 시간의 내공을 쌓았다고 해야 될 정도이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청소, 빨래, 설거지로 열심히 문지르고, 닦아대고 있으니, 나 역시 지워대기 전문가이다. 빨래를 하면서 오후에 했던 작은 아이의 말을 떠올렸다.

‘엄마는 나보다 이 옷이 더 중요하지?’ 이 한마디가 꽉 막힌 도로를 달리지 못하고 서 있는 답답함처럼 귓가에 매달려 있었다. 엄마인 내가 해야 될 일이 지워대는 일일까? 그럼 나에게 묻은 먹물은 누가 지워 줄까?


다음 날. 며칠 전 사들인 문학 전집에 아이들의 손이 가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는 잽싸게 한 권 집어 들고 와서 내 옆에 붙어서 한마디 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눈치를 챈 것이다.

“엄마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무슨 내용 이예요?”

아이가 집어든 책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었다.

“엄마처럼 사는 게 어떤 것인지 한 번 읽어봐!”

“엄마처럼 사는 게 뭔데요?”

“... ”

그때 나는 엄마처럼 산다는 것은 지우며 사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아들이 어려서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여자의 일생이 지우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자식들이 묻혀 온 얼룩들을 지우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내 얼굴까지, 내 감정까지, 내 시간까지, 내게 남은 모든 것이 지워질 때까지 그렇게 지우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지워대도 정작 내 얼룩을 지워 줄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처음에는 남편이 조금은 지워주길 바랬었다. 그 바람도 내 생각대로 해 주질 않을 때는 남편을 원망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바라지도, 원망도 하지 않는다. 포기! 포기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 누구도 내 얼룩을 지워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냥 이렇게 혼자서 덤덤히 지우며 사는 것이다. 이제는 내 얼룩을 지울 수 있는 시간만 있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도 쓸데없는 것일까? 혼자 지워대는 일은 외롭고 힘들다. 그리고 지친다. 내가 있어서 웃는 아이들이 있고, 남편이 있으니까. 그러면 된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야! 오늘은 지워대기가 너무 힘든 날이다.

이렇게 지워대는 시간이 힘들고 지쳐서 귀찮은 먼지처럼 달라붙을 때면 비 오는 날을 기다리면 된다. 비 오는 날에는 유리창에 매달린 먼지가 씻겨 내리듯 그렇게 내 속에 달라붙은 먼지를 지워줄 테니까. 비를 기다려서 인가 봄으로 들어서자마자 비가 달갑게 내리고 있다. 오늘은 웅크리고 앉아 빗방울이 한 움큼씩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유리창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내 마음에 씻어 내야 될 얼룩이 많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친정엄마가 주섬주섬 싸 주신 까만 비닐봉지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뭐가 들어 있는지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뻔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짐작대로 농사지으신 호박 몇 개, 무, 김치 등등이 있었다. 그리고 낡은 커튼도 들어 있었다. 한 삼 십 년도 더 된 빛바랜 꽃무늬 커튼. 아들의 버리라는 잔소리를 피해 당신 손으로 버리시지 못하고 까만 비닐봉지에 숨기다시피 해서 우리 집까지 보내신 것이다. 제 빛깔이 없는 낡은 커튼을 꺼내면서 엄마도 노인네의 구질구질한 구석을 보이는 것 같았다. 전 같으면 그 구질구질함에 한숨을 쉬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한숨도 내쉬지 않는다. 여자는 친정엄마를 닮는다고 했던가! 언젠가 나도 그 구질구질함까지 닮아갈 테니까!

아니, 엄마는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그 커튼을 지우기 싫으신 것이다. 그 커튼 속에는 아버지와 함께 처음 집을 짓고 나서 세상 모든 것을 얻으신 것 같은 뿌듯함이, 아버지와 주고, 받으시던 활짝 핀 웃음이 묻어 있었고, 또 그 커튼을 고르시던 손끝에 묻어있는 30년 전 나이를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 커튼도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엄마의 그때 그 나이와 아버지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은 나이를 먹지 못하고, 차곡차곡 그 모습 그대로 묻어 있었던 것이다. 나도 여자의 인생을 이해하게 된 나이가 된 것일까? 아직도 지워대지 못하고 있는 엄마의 기억에 애틋한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먹물처럼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은 엄마도 있었고, 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처럼 애써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아프면 아픈 대로 내 자신을 위로하면서, 슬프면 슬픈 대로 내 자신을 안아주면서 그렇게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이게 뭐야?’ 자꾸만 낮에 한 말이 영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쏘아 붙인 이 말이 혹 아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먹물 자국으로 남을까 걱정이 된다. 내가 지금의 아들만한 나이에 나도 친정엄마께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겼었다.

친정 엄마는 우리들 삼 남매를 키우실 때 월남 전쟁으로 몸이 불편해지신 아버지 대신 힘들게 키우셨다. 옷을 사도 남편과 아이들 옷을 사게 되고,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하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책을 보고, 어딜 가고 싶어도 아이들이 싫어하면 가지 않고 ,먹고 싶은 것도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으로 흐뭇해하며 살고 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우리를 아끼셨지만 정작 당신의 모습은 주름만 남기며 모든 것을 다 지우며 사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가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래서 버럭 버럭 대들었었다.

‘엄마가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어!’

그 말이 지워지지 않는 먹물이 되어 내 가슴에 묻어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친정엄마를 향해 하염없이 달려가 용서를 빌고 싶다. 그래도 지우고 싶은 창피한 기억들로 묻어 있는 내 가슴이 있어서 좋다. 눈물과 아쉬움의 자국이 묻어 있는 내 가슴, 그냥 이대로가 좋다. 지워지지 않는 자국들이 간혹 나를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난 이제 지우고 싶지 않다. 지울 수 있다 해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커서 지금 내 나이쯤 되었을 때 내 가슴에 묻어 있는 많은 얼룩을 내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눈물로 용서를 비는 지금의 내 모습을 아들의 두 눈에서 보고 싶다. 아련한 시간은 막혀있다는 답답함도 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아서 좋다. 또 아련한 시간은 나를 스친 모든 인연들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그들에게 남긴 먹물 자국을 참회한다. 그런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먹물이 고마웠다. 이렇게 먹물은 또 다른 ‘나’로 건너 주었다.

차츰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는 밤. 오늘밤은 빗소리가 더욱더 세차게 내 가슴 속 얼룩을 적셔 주고 있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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