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넘기

by 채선후

아름다울수록 다가서기에 그 문턱이 높다. 아니! 문턱이 높을수록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자신을 태우며 다른 사람 눈빛까지 물들이는 때깔은 아름답다. 그런 때깔은 좀 높은 곳에 있어도 좋다. 쉬이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가을에는 조금씩 그 문턱이 높아간다. 가을은 산 전체가 울긋불긋하게 핀 꽃, 산화(山花)가 된다. 가을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비록 낮은 산이라 해도 고개를 높게 치켜들게 하는 때깔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곱게 단풍이 물든 산을 볼 때면 턱은 좀 치켜들어야 한다. 마치 콧대 높은 화려한 꽃을 올려보듯 그렇게 봐야 한다. 더 아름다운 이유는 산을 바라보던 누군가도 때깔을 물들이던 가을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비가 한 차례 내리더니 마른 가지 사이로 바람 소리에서 냉랭함이 흠씬 묻어났다. 그랬어도 높은 문턱을 넘어오기만 고대하는 곳이 있다. 어서 넘어오라고, 어서 나를 넘어가라고 기다리고 있는 곳, 그곳은 산이 아닌 부뚜막에 있다. 그곳에서 때깔은 시뻘건 불꽃이 되어 넘어간다. 그곳은 부뚜막에서 좀 높은 곳에 있다. 그런 그곳은 부넘기다.

먹빛 한 줌이 하늘 저 끄트머리에 살짝 얹혀 있었다. 그는 지게를 짊어 멨다. 매산에 가려는 것이다. 매산은 동네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 그가 어릴 적에 동무들과 새총을 만들어 놀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던 산이었다. 매산은 푸근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찔레꽃이 피는 봄이면 붉은빛이 발그레한 아가씨 얼굴빛처럼 수줍게 보였다. 가을이면 가진 아름다움을 다 뽐내듯 때깔은 울긋불긋했다. 샛길에는 가을을 화려히 물들였던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사이로 흙빛이 새초롬히 드러났다. 그는 떨어진 나뭇잎을 자루에 주워 담았다. 잎은 바삭거렸다.

생기 옅어진 솔잎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성당에서 잠깐 비를 피하기로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집으로 서둘러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두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치켜들게 한 때깔이 딱, 거기 있었다. 흰빛이 눈 가득 들어왔다. 그것만 보였다. 흰빛은 물안개처럼 피어났다. 그 뒤에 있던 붉은 벽돌 성당도, 풍성한 향나무 잎도, 노란 은행잎이 쌓인 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흰 양산은 면사포가 되어 그녀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얼굴이, 그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양산을 접었다. 어깨에서 찰랑이는 단발머리는 윤기가 흐르는 칠흑빛이었다.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멈췄다. 그녀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게고 뭐고 냅다 성당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짊어진 지게는 더욱 무거웠다. 지게에는 가을을 태우던 때깔들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아궁이 앞에 그것들을 쏟았다. 지게 위에 함께 따라온 냉랭한 바람도 쏟아졌다. 그는 마른 솔잎에 불을 붙였다. 성냥불이 잘 켜지지 않았다. 손이 자꾸만 떨렸다. 부엌에 뿌연 연기가 짙어지고 있었다. 굴뚝으로 빠져 나가지 못한 것이다. 부넘기가 재를 가라앉혀 연기가 굴뚝으로 빠져나가도록 하는데 그곳에 말썽이 생긴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오래된 아궁이였으니까.


불이 넘어가는 문턱, 부넘기. 그 문턱 역시 높다. 그래서 아무거나 들어가지 못한다. 화려한 때깔의 불꽃만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넘기는 불길이 방고래로 넘어가게 하여 방구들을 데워지도록 한다. 방구들 아래는 불꽃이 지나가는 고랫길이 있다. 고랫길 옆은 자잘한 자갈로 채운다. 그 위를 구들장이 될 널찍한 돌로 덮여있고, 돌 위를 황토로 바른다.


그는 따뜻한 물에 황토를 개었다. 황토는 밀가루 반죽처럼 고왔다. 무너져 앉은 부넘기에 그것을 발라 넣었다. 말썽을 부렸던 벽 전체를 싹 긁어냈다. 긁어낸 부분에 적당한 크기 돌덩이로 높낮이를 맞추고, 새로 황토를 발랐다. 가라앉은 부넘기도 적당한 돌덩이를 얹어 구들장 높낮이를 고르게 했다. 부넘기가 다 되면 아궁이 속에서 불꽃이 부넘기를 넘어 고랫길을 타고 방바닥 구들장까지 넘어올 것이다. 그러면 아랫목은 뜨뜻해진다. 그는 그런 문턱을 넘어 나가기 싫었다. 겨울이면 더욱 싫었다.

불도 넘어야 되는 문턱이 있다. 그곳이 높을수록 불꽃은 더욱 화려히 타오르며 문턱을 넘어간다. 만약 넘지 못하면 매운 연기로 눈물이 날 수도 있다. 불도 높은 턱을 잘도 넘어가는데, 그러는데…. 그는 불꽃이 고랫길을 따라 잘 넘어간 방구들에 누웠다. 아랫목은 온몸을 녹일 정도로 뜨듯했다. 그는 코앞에 있는데도 넘지 못하는 그 문턱을 생각했다. 아! 넘지도 못하는데 왜 이렇게 떠오르는 거냐. 요 며칠 누우면 그녀 얼굴이 떠올랐다. 살굿빛 치마, 은방울꽃빛 블라우스, 앵초빛 레이스 달린 하얀 양산. 양산 속에서 빛나던 칠흑빛 단발. 그리고 금낭화 입술. 그 해 봄, 그를 물들이던 때깔들이었다. 그 때깔들은 넘지 못할 문턱이었다.

다음날 밤. 불은 부넘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허나 잊지 못할 때깔들이 그의 가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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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오토바이 하나가 동네 전체를 딴 세상으로 만들어 버릴 때가 있었다. 부우웅붕붕. 소독 오토바이 소리가 동네 골목길 저 끝에서 들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 나갔다. 소독 오토바이 뒤꽁무니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가 골목을 가득 메우면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늘 다니던 골목길인데도 골목길로 보이지 않았다. 길가 옆에 있던 전봇대도 보이지 않았다.

흰 소독 연기는 어린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이었다. 오직 흰 구름과 나만의 세상이라고 해야 할까. 흰 소독 연기는 세상이라는 문지방을 넘어온 구름이었다. 구름이 나를 보러 넘어온 거 같았다. 어린 나는 동화책에서처럼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선녀가 된 것 같아 마냥 좋았다. 이내 사라질 연기라지만 그 느낌을 놓치기는 싫었다. 연기를 빠져 나오면 보이는 건 닳아진 흔한 세상이었다. 세상은 내리막길처럼 낮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간혹 놓치기 싫은 느낌에 서 있을 때가 있다. 계절이 바뀔 때가 그렇다. 놓치기 싫어 뒤돌아 찾아볼 때면 이미 그것은 저만치 문지방을 넘어가고 있을 때가 있다. 그때는 세상이 조금 더 높게 보인다. 지금이 그렇다. 얼마 전까지 창문 밖 높다란 아카시아 나무는 잎이 무성한 것이 청청했다. 싱싱한 초록이 더없이 나무다워 보여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청청하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문득 겨울이 문지방을 넘어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가을은 문지방이 높다 하지만 요즘은 속도까지 빨라지고 있다. 가을이 아쉬워 붙잡고 싶어도 순식간 놓쳐 버린다. 너무 빠르게 가고 있어 아쉬운 시월 끝이다.


가을이 문지방 끝에 서 있다. 왜 이리 바쁘기만 한지 모르겠다. 언제고 한 번 가을 단풍을 가보려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주말이면 아이들 학교며, 학원으로 실어 나르기 바쁘다. 아이들도, 나도 정신없이 산다. 아이들은 흰 연기를 따라다닐 새도 없다. 아니, 이제 소독 연기도 공중에서 뿌리고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 속도에서 멈춰버리고 싶다. 그러고만 싶다. 나는 살인적인 과학기술의 진보에 짓눌린다. 너무 빨라 그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 허둥댄다. 가끔은 미끄럼틀에서 쑥 미끄러져 내리는 생활의 속도에서 멈춰보고 싶어도, 누군가 잡아 주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속도의 중독에 살고 있다. 가만히 붕붕거리며 소독을 뿜어대던 오토바이 소리가 기다려진다. 아주 잠깐이라도 연기를 따라 숨차게 달려보고 싶다. 그 속에서 신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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