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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희 Jan 23. 2023

나이지리아 사람 발(Val) 이야기

아모르파티(운명을 사랑하라)

동그랗고 검은 평범한 얼굴에 흰머리가 곱슬곱슬하고 적당히 살집이 있는 내 모습은 전형적인 아프리카 사람 얼굴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1700년대쯤 노예선을 타고 온 아프리카인의 후손으로 쉽게 생각하지만 조상은 같을지 몰라도 미국에 살게 된 이유는 그들과 다르다.

 내전과 분쟁의 위험에서 자식을 보호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나는 20살이 되었을 때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나이지리아의 공용어가 영어라서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는  쉬웠지만 독특한 억양이나 발음 때문에 대학 다닐 때는 가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유학 생활 중 만난 남편과 결혼을 해서 미국 시민이 되었고 화학 교사로 지내며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뉴욕에서 보냈다. 내 삶은 평범했고 평화로웠다.


TV 뉴스 속 총기 사고나 테러는 그냥 늘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일도 있구나!’하며 안타까워했지만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독 기념일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예쁘고 똑똑한 내 딸이 한 사이코패스 청년의 이유 없는 총질에 무참히 살해된 날 늘 그대로일 것 같은 삶의 평화가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절망의 돌에  부서져 박살이 나버렸다.

  그 일 이후 우리 부부는 딸과의 추억이 있는 뉴욕에서 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뉴욕을 떠나 유학 생활을 했던 시카고로 이사를 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딸을 잃은 고통으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남편이 암에 걸렸고 딸이 떠난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가족도, 동료도, 친구도 없는 낯선 시카고에 혼자 남겨진 채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시간 보내야 했다. 혼자인 것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아침에 눈뜨는 것조차 괴로웠다.

 아버지는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려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지만 내 삶은 안전하지 못했다.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의 초원에 서 있는 얼룩말처럼 두려움에 떨면서 주변을 살피고 늘 뒤를 조심하며 지냈다.

 나의 세계는 내 집과 집 앞 화단 옆 50미터 정도의 보도가 전부였다. 집안에서 생활하다 하루 한 시간쯤 집 앞 보도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상이었다.

 어느 날인가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내 삶에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들어왔다.

토끼는 화단에 잠시 머무르다 누가 지나가면 화들짝 놀라서 숨어버리곤 했다. 마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토끼를 보려고 집에서 작은 의자를 하나 꺼내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안부를 묻고 날씨 이야기를 하고  화단에 핀 수국 토끼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기도 하고  차도 함께 마시며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동네 친구가 된 한국인 친구는 '아모르파티'라는 한국 노래를  친절하게 영어로 가사까지 번역해서 선물해 주었다.

제목이'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인데 가사가 와닿고 리듬이 아프리카 사람인 나에게 잘 맞아서 매일 듣게 되었다.

 하루는 집 앞 보도를 벗어나서 공원으로 산책을 가자는 그녀의 권유로 숲 보호구역까지 한 시간 동안이나 산책을 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세상으로 다시 문을 열고 조금씩 나가고 있었다.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나자

'닥치지도 않은 어떤 상황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에 떨며 살아있는 날을 죽은 사람처럼 보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하다고 믿고 지냈던 곳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위험하다고 피해온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은 아직 잘 살아내기도 하는데  불행을 어떻게 예측하고 피할 수 있을까?

나는 죽은 삶이 아닌 살아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화학 선생이었던 경험을 살려 지난달부터 동네 도서관에서 주말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조금 더 용기가 생기면 지역 칼리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강의를 하나 맡아볼 계획이다.     

오늘은 나의 세계를 다시 열게 해 준 작은 토끼 친구에게 당근 간식을  내놔야겠다. 물론 토끼가 용기를 내서 다가올 때까지 '아모르파티'를 들으며 인내심 있게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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