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언주 Nov 13. 2022

크라잉 클럽

2화

 지난가을 아내인 메이는 대학에서 안식년을 맞아 몬트리올로 떠났다. 세 살 난 아들을 장모에게 맡기고 잠깐 다녀올 거라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캐나다에 가고 몇 달을 보낸 메이는 현지에서 교환교수 신청을 했다.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말에 나는 반대하지 못했다. 

  며칠 전 아내는 중요한 책을 잃어버렸다며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띵동, 우체국 안에서 번호 바뀌는 소리가 울렸다. 입구를 지키던 보안요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업무 속도가 느려 다음 벨이 울리기까지 27분이나 걸렸다.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일을 끝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알은체했다. 마스크를 내린 마리오가 웃었다. 마리오가 옆자리에 앉으려 하자 보안요원이 한 칸 띄워 앉으라고 했다. 벽시계가 여섯 시가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번호판만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업 종료 벨이 울리고, 접수번호를 받아 내일 다시 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어쩌겠냐는 듯이 마리오가 어깨를 들썩하고 일어섰다. 

  비가 지나간 가로수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상하이에서는 겨우내 푸르던 가로수가 새싹이 나면서 묵은 잎이 떨어진다. 발목까지 빠지는 벤저민 낙엽을 밟으며 나는 마리오에게 한국의 사계절을 이야기했다. 마리오는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자랐다는 그는 이곳이 춥지 않아 좋다고 했다. 길 건너편에 마라탕 간판이 보였다. 눈짓으로 마라탕 집을 가리키자 그는 커이, 하고 대답했다. 

  마리오는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의자에 얹힌 택배 상자를 잡았다. 국제 특송으로 물건을 보내다 보면 매번 손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컨테이너로 칠레산 포도주를 들여오고, 상하이에서 의류와 전자제품을 실어 보내는 일을 했다. 마리오는 마라탕 때문에 중국을 떠날 수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가 물로 입을 헹구고 시자회이 근처 월세가 더 낮은 원룸은 없는지 물었다.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친구의 포도 컨테이너가 석 달째 부두에 묶여 있다고 했다. 자신의 중개 수수료를 낮춰 보겠다는 계산이었지만, 얼마 전에도 남미에서 온 친구 두 명을 소개했다. 나는 마리오에게 오늘 저녁 시간이 어떤지 물었다. 같이 술이나 한잔할 생각이었다. 마리오는 우사모로 갈 거라고 했다.

  아, 그 크라잉 클럽.

  며칠 전에 나도 그곳엘 다녀왔다고 하자 마리오는 웃으며 함께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좀 걷기로 했다. 혼잡한 거리는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사람들과 몸이 부딪쳤다. 소음 때문에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로 그는 88년생이라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삼촌과 함께 오퍼를 했고, 독립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카페 거리를 지나며 대화는 자연스럽게 우사모로 흘러갔다. 마리오는 내게 그곳의 느낌이 어땠는지 물었다. 나는 와인보다는 맥주가 더 어울리는 곳 같더라고 대답했다. 

  노 노, 칠레 와인 좋아요. 

  마리오가 정색하며 손을 저었다. 

  크라잉 클럽은 지난번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미러볼 조명이 돌아가고 밴드 소리로 스피커가 쿵쿵거렸다. 스탠드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이 마리오를 향해 손짓했다. 마리오가 둠칫거리며 내 팔을 끌었다. 닉과 자하르에게 주먹인사를 하고 함께 있던 나를 소개했다. 여자는 바에 두 손을 짚고 서서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몸을 숙였다 일으키는 여자의 가슴골이 슬쩍슬쩍 드러났다. 마리오는 순식간에 흥이 달아오르는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커진 그가 바텐더에게 마이크를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더니 사회자처럼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나는 와인을 마시며 마리오를 지켜보았다. 남미로 코이카 봉사활동을 다녀온 선배가 그곳 사람들은 몸이 비트박스라고 했다. 날 때부터 흥으로 차 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대형 스크린에는 현란한 무대 의상을 한 여가수의 얼굴이 커다랗게 잡혔다. 

  아, 모르겠고. 아모르 파뤼.

  마리오의 과장된 몸짓에 휘파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볼륨을 좀 더 키워 줄래요.

  여자가 안쪽에 있는 바텐더에게 손짓했다. 사이키 조명에 볼륨을 높인 밴드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워지자 신기하게도 실내는 평온한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회원들은 음료와 다과를 가지고 빈자리를 찾았다. 마리오는 내게 알아서 편한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파티션 하나를 차지한 나는 타이와 마스크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자리 표시등이 모두 사라지고 조명이 꺼졌다. 나는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졌다. 한참 걷고 웃었던 터라 졸음이 몰려왔다.

  파티션 벽에 설치된 모니터가 켜졌다. 구두 소리가 나고 여자가 무대 가운데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 있는 헤드셋을 쓰라는 자막이 지나갔다. 무대 오른쪽에서 핀 조명을 받은 여자가 등받이 없는 높은 의자에 올라앉았다. 여자의 목선이 하얗게 빛났다. 길게 늘어진 검은색 시폰 원피스 자락 사이로 발목이 여린 꽃대처럼 보였다.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자 여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그게 뭐라고 수고했다는 말에 콧등이 시큰거렸다. 언젠가 로밍해 놓은 한국 휴대폰으로 내게 문자를 보낸 적이 있었다. 지칠 때마다 나는 그 문자를 열어 보았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에요.

  나는 모니터와 무대 위에 있는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치켜든 여자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핀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실루엣이 조금씩 풀어져 형체가 뭉개지고 희끄무레해진 여자의 모습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헤드셋을 쓰고 있어 어두운 동굴에 혼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곧 다른 생각이 밀고 들어왔다. 멍한 상태로 잠깐잠깐 졸았다. 

  열 시가 되자 실내는 다시 환해졌다. 개인 등이 켜지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랜만에 푹 쉬었다는 기분으로 몸이 개운했다. 자리를 정리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울음바다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런 반전도 나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마리오는 보이지 않았다.     

이전 01화 크라잉 클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