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메이와 나는 7년 전 처음 만났다. 상하이로 유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다가 건물을 향해 걸어오는 그녀를 무작정 따라갔다. 정장 차림에 백팩을 메고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그녀는 중급반 회화 담당 교수였다. 나는 그녀의 눈에 띄기 위해 수준에 맞지 않는 수업을 들었고, 3년을 연구실 앞에서 기다렸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무역회사에 입사한 후 메이에게 청혼했다. 부모를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는 그녀를 위해 상하이 지사 근무를 자원했다.
언젠가부터 메이는 부부가 함께 가야 하는 자리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상사의 부인들 가운데 아내에게 중국어를 배운 사람도 있었다. 그녀들은 메이에게 선생님이라면서도 자신을 사모님이라 부르게 했다. 자기들끼리 한국말로 나누면서 메이의 눈을 보고 웃었다. 웬만한 한국말을 알아듣는 메이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견뎠다. 본사 귀임 발령이 났지만, 임신과 출산 때문에 나는 주재 기간을 연장했다. 회사 규정상 귀임을 두 번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장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부동산 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올 때 주변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한마디씩 했다. 남들 눈에 그럴듯해 보일 뿐이었다.
장인은 암으로 위 절제 수술을 했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다. 우리는 서로가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이며 두 해를 보냈다. 외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는 나보다 조부모를 더 따랐다. 현도야 하고 내가 한국말로 이름을 부르면 뿌야오,라며 버둥거렸다.
뿌야오(不要). 부정과 거부를 드러내는 중국말이다.
침대에서 바라보는 회칠한 천장이 가슴 위로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거리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로 가득 찼다. 봉쇄령이 풀렸다고 해도 국경은 폐쇄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엄마가 혼자 서울에 있었지만, 한번 다녀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숨이 막혔다. 길 옆으로 프랑스 오동나무가 길게 이어졌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너울거리는 잎사귀 사이로 비쳐 드는 저물녘 햇살을 바라보았다. 우사모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