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그룹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쿠데타를 모스크바에서 겪다
정말 혼이 쏙 빠진 하루였다. 그래도 이렇게 상황이 생각보다 빨리 진정이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 인생 중 하루 만에 가장 큰 염려를 한 몸에(?) 받았던 하루에 대한 기록을 남겨보고자 한다.
23년 6월 23일(금)
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해서 집 앞에서 치킨을 먹고선 집에 와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 10시쯤 러시아인 지인이 잠을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는데, "바그너 그룹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라고 난리가 난 것이었다.
너무 졸려서 얼마나 큰일이 난 건지 온전히 생각도 잘 안 되는 비몽사몽 한 와중에, "큰일 난 건가.. 아닌가.. 맞나.. 가짜 뉴스인가... 진짜 뉴스인가.." 하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11시쯤 다시 또 잠을 깨워 이거 진짜 맞다고 하는 바람에 나도 조금 더 찾아보니, "와 이거 큰일 난 것 맞는가보다.." 싶었다.
하지만 1주일간 너무 피곤했었는데.. 그걸 이기지 못해서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지 못하고 다시 잠들었다.
23년 6월 24일(토)
아침에 일어나니 한국 뉴스에서도 메인으로 이 소식이 올라와있었다. 카톡으로도 "너 괜찮아? 모스크바 난리 났던데" 이런 연락들이 와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현지 뉴스, 여기서 러시아인들이 많이 하는 SNS인 텔레그램 채널들을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니 어제 친구가 얘기했던 것들이 제대로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바그너그룹 수장인 프리고진이 러시아 군사 정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며, 25000명의 병력을 끌고 모스크바로 오겠다는 음성 메시지를 전파한 것이었다.
바그너가 이미 로스토프 나도누 지역을 사실상 점령했고, 보로네쉬 지역을 무장해제 했다는 제보들이 올라와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도시 다리들도 통제되고 있으며, 모스크바로 진입하는 고속도로에도 경찰들이 포진해 있다는 제보가 올라와있었다. 현지 교민 단톡방에서도 메인 도로 중 하나인 곳에서, 도로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이런저런 제보 영상을 보다 보니까 나도 너무 무서워지기도 했다.
하루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진전 속도가 너무 빠르기도 해서 당황했고, 한창 작년에 전쟁 터졌을 때 혼란스러웠던 기분을 다시 오랜만에 느끼며 회사 분들과도 상황 공유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푸틴 대통령은 현지시각 10시쯤 연설을 했는데, 내용인즉슨 "배신과 내부 혼란은 큰 위협이며, 범죄 행위(쿠데타)에 가담하지 말라. 우리는 시련을 극복하고 강해 질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연설 안에는 로스토프나도누에서 군 당국의 활동이 사실상 차단됐다(통제력을 잃었다)는 내용도 있었기에 확실히 로스토프나도누는 수복된 게 맞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취소할 수 없었던 약속이 있었던지라 외출을 하고 들어오는 길, 여기저기 서있는 경찰을 보며 한층 보안이 강화됐다는 걸 눈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외출을 잠시 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계속 현 상황에 대한 연락이 오는 바람에 손에서 휴대폰을 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 역시도 긴장상태가 계속되어 휴대폰을 최소 5-10분 단위로는 계속 보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딜리버리를 통해 쌀과 이런저런 식량과 생필품을 조금 주문을 했고, 한국에서 요청한 자료를 작성하고 긴급회의에 대비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는데!
오후 9시경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이 협상을 통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걸 회군시켰다는 기사가 떴다. 모스크바 현지 지인들도 '어 그럼 이제 다 끝난 거 맞지!'라고 연락이 왔었는데, 아직은 프리고진이 성명을 냈다는 기사가 없어서 '잠시 기다려보자' 하였으나, 곧 프리고진도 '군대를 회군시켰다'는 성명을 냈다.
이 긴----하루를 통해 느낀 점은..
1. 러시아사람들은.. 참 침착하다..
침착하다는 건, 때에 따라 좋은 의미가 될 수도 나쁜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불안하고 걱정하는 와중에도 "아 어떡해 어떡해!!!!!!!!" 하거나 울고불고하지는 않는데.. 이런 이 나라의 국민성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정말 모스크바엔 아무 일 없을거라 믿는 사람들은 그냥 일상을 원래대로 살았고, 만약 무슨일이 생길 수도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차분히 생필품 장을 보는 것이었다..!
2. 러시아 사람들도 이 상황에 많이 지치긴 했나 보다.
남쪽 지역들에서도 큰 저항 없이 도시 수복이 이뤄졌단 것도 그 이유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또 무엇보다 이번 쿠데타가 러우사태가 종료될 수 있는 매우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바그너는 반불법적 집단인데.. 이들을 응원할 수도 없고..' 하며 갈등하는 눈들도 볼 수 있었다.
3. 목숨다바쳐 일하는 주재원?
나는 주재원, 그저 회사원으로 나왔을 뿐인데..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할 수도 있구나.라는 걸 느꼈다. 사실 모스크바로 저 군대가 바로 내일 들어오면, 들어와서 바로 로켓을 쏘기 시작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해 보면.. 대책이 없었다. 이 가정 하에 유일한 대책이라 하면.. 나 혼자 비행기 티켓을 빨리 사서 인근 국가든 한국으로든 가는 게 가장 빠르고 유일한 생존법이겠다 싶었는데.. 막상 그렇게 결정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기에 차라리 회사 안에서 미리 액션플랜을 촘촘히 짜두어야겠다, 생각을 했다. 얼마나 실효성 있는 플랜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원의 목숨을 1순위로 해주는 계획을 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지 않고선 어찌보면 정말 목숨 걸고 여기서 일하는 거다 라고 생각해야겠구나 싶었던 하루다..
4. 같은 곳, 같은 시간을 살아도 느끼는게 다르구나!
정말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살면서 1년 같은 하루를 보냈다. 오늘 하루를, 같은 모스크바에서 보내면서도 나는 위와 같은 생각을 하였지만, 다른 분들은 또 '그래도 상황이 정리되는 걸 보니 여전히 푸틴은 견고하고 능력이 있다'라고 생각하시거나, '아무일도 없어요 걱정 마요~'라고 하는 의견을 들으며.. 같은 곳에서도 참 상이하게 느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같은 모스크바에 있어도 다르게 느낄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 느낀 오늘의 소감을 잊지 않고자 이렇게 남겨본다.)
5. 평화가 최고다.
어찌됐든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인들도 모두 제발 무사히 안전히 지낼 수 있게 되기만을 바라본다. 얼른 이 상황들이 모두 종료되어, 모두가 평화롭게 안전히 지낼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소회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