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4
○ 문제의식
“너 뭐해먹고 살래?” 이 질문은 알다시피 즐겨 먹는 요리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당신은 앞으로 어떤 경제생활을 하며 살 생각이십니까?”라고 물었다면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되지만, ‘너뭐해먹고살래’ 이 외침은 표면적으로는 일곱 글자지만 칠십 글자만큼의 해석의 여지가 있다.
-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 생각은 하면서 사는 거니?
- 너는 진로 계획이 있니?
- 계획을 실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니?
-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니?
- 너가 돈을 벌 수 있겠니?
- 너가 독립해서 살 수 있겠니?
세대 간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놀랍게도 이 일곱 글자의 함의는 자녀, 손주, 학생, 청소년에게 정확하게 전달된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고 한 숨이나 미간을 찡그리는 비언어적인 표현만으로 전달될 때가 있다.
‘나는, 우리 집은 안 그러는데’ 생각하는 보호자가 계실 것이다. 물론 가정에서라도 그런 압박을 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이미 청소년들이 접속하는 대부분의 사회관계망에서 직간접적으로 ‘돈이 최고다’는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송신 중이다. 물론 세상은 공존, 관용, 명예, 배려, 사랑, 신뢰, 우정, 정직, 존중, 지혜, 평화 등 다른 가치들도 송신하지만 돈이 가장 직관적이다. 돈이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돈이 곧 자유다. 자본주의 국가라면 그러지 않은 곳이 어디 있냐고 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은 특히 심하다. “너가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를 최대한 빨리 찾아서 할 수 있는 준비를 시작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넌 뒤처지게 돼“ 어린 나이부터 이런 메시지를 수신해야 하는 곳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해라!’는 외침은 공허해진다. 하고 싶은 게 돈이 되지 않으면 그건 선택지에서 삭제될 확률이 높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문·이과 선택 비율이 취업 가능성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라!"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학자의 대답 : 누가 일을 힘들게 만들었나?
[최강1교시] 누가 일을 힘들게 만들었나, 철학자 강신주 / 강연 일부 발췌
취업준비생은 일을 싫어하면서도 취업을 원하는 모순을 겪는다. 대다수 직장인들도 비슷하다. 일을 좋아해서 하기 보다는 취업 후 그저 먹고 살기에 바쁘다. 경제학자나 교수들이 “그게 삶이다”라고 얘기하지만, 철학자로서는 너무 안타깝다. 왜 일이 싫어졌을까?
과거에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겨울엔 자식들과 시간을 보냈다. 과거에는 꼭 필요한 순간에만 노동을 했다.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서 남는 시간에는 놀이를 했다. 자본주의 발달 후 우리는 더 잘 살게 되었을까? 자본주의 사회 도래 후 노동시간이 훨씬 더 늘어났다.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면서 일이 싫어진 것이다. 일이 끝난 후에는 휴식하기 바쁘다. 에너지가 없으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주변에 귀촌, 귀농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고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간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놀라운 특징은 우리의 노동력만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전공들은 취업을 위한 학과이다. 비인기과는 대체로 취업이 어려운 학과다. 대학에서 지식 기술 등 내가 배우는 모든 것들은 고용이 되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게 된다. 고용주가 원하는 기술을 배워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돈을 버는 구조이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고용주가 원하는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이다. 공부가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 성적, 스펙, 취업과 무관하게 마냥 재밌었던 일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일에 지쳐서 진짜 행복하게 일했던 기억을 잊고 산다.
<중략>
자본주의 사회는 놀이를 잃어버렸다. 현재는 놀이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폭죽을 좋아하는 사람한테 “왜 돈 낭비해?”, “쌀이 나와 밥이 나와?” 한다면 그 사람은 놀이의 세계를 모르는 것이다. 꽃구경 갈 때, 노을을 볼 때 “그거 봐서 뭐해?” 이런 질문을 한다면 되묻고 싶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 해석
3~5월에 대안학교 편입 문의가 와서 학부모 상담을 하면 대개 아래와 비슷한 사례다.
“아이가 초등학생 때는 좋아하는 것도 많고 적극적이고 활발했는데, 중학생이 되고 나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 힘들어했어요. 1~2년 동안 아이와 싸우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애썼는데 지금은 아예 학교 가기가 싫대요. 학기가 시작되고(또는 중간고사 끝나고)부터는 학교를 안 가고 있어요. 이제는 저도 내려놨어요. 공부를 하길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구나 싶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해보라고. 뭐든지 응원하고 지원하겠다고 하고 있어요. 근데 좋아하는 게 없대요. 집에서 핸드폰만 하고 무기력하게 있어요. 대체 왜 그런 걸까요? 속 터져 죽겠어요.”
만약 청소년에게 특정할 수 있는 문제나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회복과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무기력한 상태의 청소년은 원인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특히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면 아주 어렵다. 그 기간만큼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무기력 상태가 나아지기 위해서는 작은 성취를 통해 자존감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닫힌 상태라, 작은 거라도 시작하기가 어렵다. 마냥 기다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주변 친구들이 뭐든 조금씩 성취해 나가는 것을 보면 더 자존감이 떨어지고 무기력이 심해진다. 이런 학생을 돕기 위해서는 가족, 학교, 사회가 합심해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 말고 특별한 왕도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있다. 보통은 연인 관계에서 쓰는 말이지만 지금은 청소년 자녀를 둔 학부모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자녀가 좋아하는 것이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해서 성취를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걸로 돈을 벌 가능성이 있는지’를 따지는 순간에 아이는 좋아하는 것을 하나 둘 지우게 된다. 청소년 시기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비율은 상대평가로 이미 정해져 있다. 자녀가 공부로 성취를 경험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라도 ‘자존’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운동, 음악, 패션, 게임... 뭐든지. 좋아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한다. 그리고 잘하고 싶어 진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뭐든 실력이 늘기 마련이다. 이것이 성취의 경험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취의 경험이 쌓여 자존감이 된다. 아이가 신나서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재능을 따지고 프로가 될 수 있는지 계산하면 안 된다. 아이가 그것을 그만두게 만들기 딱 좋다. 포기하는 것도 습관이 되니 주의해야 한다. 자존감을 키우는 게 먼저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무슨 일이든 해낼 것이다. 문의 내용으로 시작했더니 갑자기 상담이 되어버렸다. 청소년을 상정하고 쓰긴 했지만 성인이어도 마찬가지다. 성인이라도 내가 자존감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작은 성취부터 시도해야 한다.
청소년 상담가랍시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글을 쓰긴 했지만 세상일은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가 게임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게임은 현실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통제된 세계이기에 상대적으로 변수가 적다. 이른바 파밍게임이라 부르는 게임은 노력하면 거의 그만큼의 성취를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취의 경험을 만드는 하나의 좋은 사례로 이 게임을 소개한다.
이름 : 디아블로4 (Diablo Ⅳ) / 청소년 이용불가
제작사 : BLIZZARD
장르 : 액션 RPG
출시일 : 2023년 6월 6일 (출시 예정)
*게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른 사이트를 참조하세요
이번 게임으로 답하다는 파밍게임의 원조 디아블로 시리즈다. 2000년부터 디아블로2 출시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2012년 디아블로3, 2021년 디아블로 2:레저렉션 까지 스타크래프트와 더불어 내가 가장 오랫동안 즐긴 게임이다. 다음 달인 6월 6일에 디아블로4가 출시 예정이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디아블로 전체 시리즈를 대표해서 최신작 이름을 써 놨다고 이해해 주시길. (청불이라 아쉽다. 청소년들도 할 수 있는 파밍게임이 나오면 참 좋겠다)
디아블로 시리즈는 대표적인 파밍게임이다. 즐기는 방식이 다른 RPG게임하고는 다르다. 싱글플레이 RPG처럼 스토리를 시작해서 엔딩을 보면 끝나는 게임이 아니다. 디아블로는 스토리 엔딩을 보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해서 강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는 MMORPG와 비슷하다. 하지만 강해지려는 목적이 다르다. MMORPG에서는 대개 퀘스트, 레이드, PVP 등 앤드콘텐츠가 목적이라면, 디아블로에서는 파밍을 더 빨리하기 위해서다. 물론 랭킹, PVP, 스피드런 등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유저들도 있지만 디아블로의 핵심은 파밍 하는 재미다.
디아블로는 성취를 경험하기에 적합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투자한 시간과 성취가 비교적 비례한다는 점이다. 파밍은 반복하는 게 어렵지 사냥하는 게 엄청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른 게임에 비해 피지컬, 뇌지컬 보다는 끈기가 중요하다. 물론 아이템 드랍에 운이 작용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으니...ㅎㅎ 둘째는 래더(시즌제) 운영이다. 100여 일을 주기로 새로운 시즌이 시작하는데, 새 시즌에서는 모두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레벨1로 시작한다. 물론 스탠다드 모드에서 계속해서 캐릭터와 장비를 이어 갈 수 있지만, 파밍이 재미인 게임이기에 대부분 사람들이 새 시즌에 참가한다. 이게 성취랑 무슨 상관이냐고? 캐릭터가 강해질수록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기가 어려워지는데, 다시 레벨1 맨몸 상태에서 시작한다면 약한 캐릭터를 다시 강하게 만들어 가는 성취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하드코어 모드다. 하드코어 캐릭터로 시작하면 목숨이 딱 한 개다. 다시 말해, 한 번이라도 죽으면 다시는 그 캐릭터를 플레이할 수 없고 가지고 있던 장비는 모두 없어진다. 만약 오랜 기간 열심히 키우던 캐릭터가 죽게 되면 현실에서도 타격이 꽤 있을 정도다. 하드코어 모드에서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를 도전해서 해내는 성취와 비슷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익스트림 스포츠는 안 해봤다)
파밍게임이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성취를 경험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선택한 일로 작은 성취를 경험할 수 있기를, ‘너 뭐해먹고 살래’가 작은 성취를 막지 않기를 기원한다.
- 디아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