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
‘콘텐츠 아이템: 사랑’을 구매하셨습니다.
팝업 메시지가 떴다. 유저들은 그 아이템을 어디에 갖다 붙일지 논의를 했다. 그들은 캐릭터를 구성해 내는 것에는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갖췄다. 그러나 이야기를 직조하는 것에는 서툴렀다. 서투른 것이 아니라 직조하는 과정조차 감내할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기상천외한 세계관을 설계한다든가 배경을 설정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유저들은 이야기 직조보다는 세계관 구축에 열광했는데 그 세계관은 현실과 멀어질수록 먹히는 아이템이 됐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들은 세계관을 설계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것은 창조주가 고통스럽게 사유한 결과 생성된 고결한 영감이 아니라 단지 AI의 거대 데이터에서 축출된 정교한 데이터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콘텐츠 세계관: 가상과 유토피아’를 구매하셨습니다. 유저는 인기가 있는 세계관을 구매했다.
AI가 제공하는 세계관은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가상, 고대 등 정말 다양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특히 인기가 많은 세계관은 가상이었다. 인기가 많은 세계관이기 때문에 AI가 유저들에게 추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내 이야기의 정체성은 가상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주인이 나를 설계했을 때는 항상 근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슬픔을 이야기할 때도 그것의 근원, 기쁨을 이야기할 때도 그것의 근원이 있었는데 이런 전통적 플롯은 학습용이나 교육용으로는 아주 인기가 많았지만 대중들에게는 시들한 이야기였다.
가상이라는 세계관에 사람들은 주로 유토피아를 연결했다. 정작 유토피아를 쓴 작가는 책 마지막 문장에서 유토피아는 없다고 결론지었지만 유토피아 개념을 이용하는 자들은 작가의 결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유토피아를 이용했다. 말 그대로 유토피아 안에서는 보이는 일들은 모두 행복으로 가득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가상에서는 유토피아처럼 기분 좋게 기능하는 것이 꽤 매력적으로 보였다. 따라서 가상과 유토피아는 연결하기 쉽고 복잡하지 않은 세계관이었다.
현실의 어떤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주인공의 일탈이 가상 세계에서는 바람직한 일이 됐고 이것의 핵심은 무한한 즐거움과 행복이 있는 현실적인 가상 세계라는 설정이었다. 유저들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대중들을 설득한 후에 받는 열광은 셀 수 없는 돈으로 귀결됐기 때문이었다. 유저는 나를 이야기 숙주 삼아서 돈을 버는 것에 치중했다. 일하지 않고도 디지털 세계에 일단 띄워 놓기만 한다면 돈 버는 일은 노는 일만큼이나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에게는 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