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현이는 다시 예전처럼 환상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조화롭게 일할 생각에 기대가 컸다. 그사이 남현이는 자신이 아주 큰 성장을 한 것 같았다. 온화함은 점점 진화됐고 대화 생성에 방해가 되는 배출 어휘의 비트 체계를 분류했고 프로그래밍 코드 모두 완벽히 입력해 놨다. PM은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JJ봇의 최종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알렉스는 완벽한 녀석이었기에 회의 시작에 앞서 남현이에게 몇 가지 특별한 역할을 주문했다.
“남현, 지금까지 남현이 한 발표는 훌륭했어. 난 남현이 정말 대단한 개발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 근데 오늘은 더 특별한 역할을 남현이 해야겠어.”
“뭔데?”
“남현, 남현이 직접 JJ봇의 사용자가 돼서 대화 생성과 가상 상황을 구성하는 거야.”
“응, 알겠어. 그럼 난 생각나는 서술어만 입력하면 되는 거지?”
“물론! 아주 좋아!”
회의가 시작됐다. 모두 긴장이 역력했다. 이 프로젝트가 제대로 종결돼야 알렉스도 마음 편히 판교에서 일할 수 있다. PM도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책임에서도 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물론 남현이도 JJ봇이 잘되면 알렉스와 새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정말 꿈꿔 왔던 것들을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빠졌다. 남현이는 알렉스처럼 냉엄하고 고요한 포즈를 취했다. 남현이는 주변이 다시 잔잔한 파동에 요동치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울림은 남현이를 신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천천히 서술어를 JJ봇에 입력했다. 그리고는 생성값 출력을 요구하는 실행키를 안 누른 듯 경쾌하게 살포시 눌렀다.
입력값
| 천천히 와도 돼. 우린 회의 시작한다.
| 〔 〕어떡하나?
| 〔 〕나무라더니….
| 〔 〕치워야지.
| 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 〔 〕시키나?
생성값
|천천히 와도 돼. 우린 회의 시작한다.
|일을 이렇게 벌이면 어떡하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더니.
|자네, 싼 똥은 알아서 치워야지.
|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이런 일도 시키나?
가상 상황
화계(상급자-하급자): 천천히 와도 돼. 우린 회의 시작한다.
화계(상급자-상급자): 김 차장, 일을 이렇게나 많이 벌이면 어떡하나? 경비 좀 생각해
야지.
화계(하급자-하급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더니. 우리가 경비 청구서 올리
면 결제도 더럽게 안 해 주면서
화계(상급자-상급자): 자네, 자네가 싼 똥은 알아서 치워야지.
화계(상급자-상급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싼 똥은 알아서 치우겠습니다.
화계(상급자-상급자): (신입 여직원이 김 차장 심부름으로 물건을 들고 오자)
자네, 아래 직원에게 이런 일도 시키나? 많이 컸네.
남현이는 이건 어느 중소기업에서 흔히 목격되는 갈굼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술어를 통해서 보면 상급자, 중간 관리자, 부하 직원이 모두 등장하는 경우라고 덧붙였다. 일전에 미반영 화행으로 인한 생성값 오류가 대폭 수정되었다고 했다. 직장에서 빈번히 쓰이는 배출 어휘를 모두 분석했고 현재까지도 분석 중이라고 했다. 배출 어휘의 비트 체계 분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JJ봇의 성능은 한층 올라갔다고 했다. 알고리즘 설계와 ‘결정적 화행 결정면’의 수식을 세운 알렉스에게 남현이는 진심으로 존경을 표시했다. 포쉬 잉글리시로는 어떻게 경의를 표현할까? 그러면서 중소기업의 일상적 제 살 뜯어 먹기 식 비아냥을 완벽히 구현해 낸 것이 이 제품의 USP라고 볼 수 있다며 발표를 마쳤다. PM과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남현이는 점차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한층 더 가까이 비트 세계를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남현이 바로 아래에도 힘들게 버티는 누군가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사촌 형이었다.
형은 서울에서 예술 경영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구에서 운영하는 예술 문화 센터에서 일한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어느 기업의 아트 센터에서 일했다고는 했는데 단순 매표 업무여서 그만두고 나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도망치다시피 해서 수도권에 있는 전문대에 입학했다. 거기 기계공학부에서 공부했는데 아주 가끔 강남역에서 사촌 형을 만나서 서울 생활의 이런저런 조언을 듣곤 했다. 사촌 형은 자존심이 무척 센 사람이었고 떼돈 번다는 큰아버지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서울살이에 차츰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했다. 다만 중간 관리자급으로 올라가면서 부하 직원과 소통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를 위해 가끔은 잔심부름시키면서 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때도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리고 구에서 지원해 주는 예산을 많이 따려면 괜찮은 음악회를 기획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꽤 인지도 있는 음악가를 초청해야 해서 경비가 많이 든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로 윗선과 의견 차이로 자주 부딪쳤고 어떤 때는 센 자존심을 지키려 선배, 동문 음악가 등 닥치는 대로 연락해서 음악회를 어떻게든 끝낸다고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떻게든 살아가고는 있다고 했다. 그랬던 사촌 형이 지금은 내 머리통을 발판 삼아 바로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도 아주 힘들게 쇠고리를 붙들고 있었다. 형도 남현이만큼이나 비트 세계로 올라가고 싶었나 보다. 강남역에서 토익이든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든 따라고 조언해 주던 자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도 나처럼 온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었다. 쓸리고 찢어지고 검게 변한 거친 몸뚱어리밖에 없었다. 그는 내 머리통을 짓이기면서 나를 발판 삼아 몸을 위로 쫙 폈다. 젖 먹던 힘을 쏟아붓더니 팔을 쫙 뻗어서 한 칸 더 높은 곳에 있는 쇠고리를 붙잡았다.
‘철퍼덕’
나는 그만 아래로 추락했다. 나의 정신은 아주 무거웠기에 추락의 속도도 엄청 빨랐다. 실낙원의 타락한 악마처럼 나는 똥 무더기에 휩싸여 몸은 더러워졌고 씻어도 씻기지 않는 죄가 덕지덕지 붙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멀리하는 고리타분하고 비실용적인 그런 것을 고답적이라고 한때는 찬양받았던 지나간 정신은 이젠 순수하게 용서받긴 그른 불필요한 요소일 뿐이었다.
알렉스가 알렉스한테서 알렉스를 빼앗기고 나서 남현이가 되었어도 남현이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판교에 입성한 후 들어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정신 체계였기에 빼앗겨도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빼앗겨 본 남현이는 그런 것에 익숙해졌는지 나를 빼앗겼을 때조차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나를 빼앗긴 대신 나에게 냄새나는 정신을 떠넘기기까지 했다는 상쾌함으로 남현이는 오히려 훨훨 날았다.
여기 아톰 세계에서 나는 큰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끝없는 배출 어휘를 키보드 위에 얹힌 무거운 손가락으로 치워 낼 것이다. 너무도 일찍 홀연히 사라지신 어머니를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악취 나는 곳에서도 상큼한 딸기를 먹을 수 있는 비위를 무장한다. 아톰계에서 천근만근 묵직해서 방방 뜨지 못할 정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이젠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