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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필사 8일째

우연히 필사

by 푸른뮤즈 Mar 17. 2025

우연히, 필사 8일째.


하루 종일 바빴다.

몰아서 끝낸 스케줄에 몸이 축 늘어지고, 눈꺼풀이 무겁다. 머릿속이 노곤해지고, 침대가 나를 유혹한다.


"필사만 하고 잘게…"


아침에 미리 해둘 걸 후회도 되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가 싫었다.

어쩌면… 이미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그 생각에 피곤한 와중에도 살짝 뿌듯해졌다.

막상 펜을 들고 보니, 필사하는 ‘방식’도 좀 바꿔보면 어떨까 싶었다. 이왕 하는 거, 더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피곤한 머리로 시를 따라 적으려니, 뭔가 더 가볍고 친숙한 게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만화 속 대사들이 떠올랐다. 가끔 만화나 웹툰을 보다가 인상적인 대사를 저장해 두곤 하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적어봤다.



“다만 살아가자면
태풍을 피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야.
가령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 타는 일을
그만두고 직업을 바꾼다고 쳐.
어떤 일을 하건 평온하고 무사할 거라곤
장담 못 하잖아?
예컨대 육지에 올라가 가게를 열었다고 해.
불경기로 상품을 팔지 못해
빚을 져야 할지도 몰라.
옆집에 불이 나 내 가게까지
전부 타버릴 수도 있고
도둑이 들어와 전 재산을 채갈 수도 있어.

살아가자면 누구나 무슨 일을 하건
불안과 어려움을 떨쳐낼 순 없어.
인생엔 정나미 떨어질 만치
갖가지 불행이 덮쳐오는 법이야.

하지만 말이야 피오렌티나.
멈추지 않는 태풍이란 없어.
태풍이 지날 때까지 참는다면 비는 그치고
먹구름도 사라지고 빛이 비쳐들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중요한 건 태풍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기력과 목표.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점이야.”
-<순백의 피오렌티나> 중-


이 대사를 적으며 만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따라왔다. 시는 문장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있다면, 만화 대사는 좀 더 쉽고 친숙하다.

장면과 함께 기억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좋다.


+가끔 드라마나 만화, 대사들도 필사에 추가해야겠다는 생각.


오늘은 연필과 색연필을 깎을 때 일부러 천천히, 느긋하게 집중했다. 그 단순한 행위가 묘한 힐링을 주었다.


색연필로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다시 연필을 깎는다. 연필깎이는 손잡이를 돌리고, 색연필 깎이는 색연필을 돌린다. 조금씩 다른 움직임들이 손끝에서 반복되며, 자연스럽게 집중력을 만든다.

연필로 필사하면 종이에 닿는 감촉이 다르고, 색연필로 강조하면 문장이 더 깊이 새겨진다.

한 줄씩 따라 적고, 마음에 남는 문장에 색을 더하고, 연필을 다시 깎으며 손끝으로 감각을 음미하는 일.


이 단순한 과정이 오늘 하루를 차분하게 정리해 준다.


"그냥 안 하고 잘까?"


솔직히 그런 생각도 스쳤다.

그럴 때,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필사를 시도하면 생각보다 쉽게 몰입된다. 오히려 피곤한 날엔 필사가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쏟아지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눈앞의 한 문장에만 집중하는 시간.

그 몇 분이 마음을 다독여 준다.


필사는 단순히 따라 적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어 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를 기록하는 시간이 되어간다.


오늘도 필사를 마쳤다.

이제 정말 푹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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