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7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량이 심하게 긁힌 뒤부터 아예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회사와의 거리도 거리지만 출퇴근을 전철로 하자 여러 이점이 많았다. 지상 역에서 2호선 전철을 타고 터널을 향해 들어가 근무하고, 퇴근 후 2호선 전철을 타고 다시 어둑한 터널을 벗어나 지상 역에 도착하는 출퇴근 루틴이었다.
겨울 추위는 누그러들 줄 몰랐다. 영하 15도의 강추위가 며칠째 지속되었다. 역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바닥이 차고 미끄러웠다. 빙설이 굳을 대로 굳어 광석 같았다. 발바닥을 적시는 감촉이 날카롭고 예리해 발걸음이 빨라졌다.
들이치는 찬바람에 콧구멍에 습기가 멍울지더니 곧 떨어졌다. 몇 분 서 있자 바람의 강속에 바짓가랑이가 찰싹 달라붙다가 종아리마저 흔들거렸다. 머리를 코트 속에 파묻다시피 하고 두 눈만 빼내어 전철을 기다리는 꼴이 여기저기 보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거센 회오리바람을 몰고 오듯 전철이 굉음을 내며 도착했고, 전철 문이 좌우로 열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리는 게 아니라 뭔가를 피하듯 양쪽으로 갈라져 내렸다. 그 뭔가를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문이 닫혀 버렸다.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사람들이 양쪽으로 팔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몸집들은 묘하게도 그것을 피해 서 있었다. 사람들이 둥근 바가지 모양의 공간을 비워 두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꺼내 그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고 몸을 안쪽으로 바짝 당기며 애를 썼다.
처음부터 그것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을 비집고 공간을 확보한 채 버젓이 존재감을 나타냈다. 몰랐으면 몰라도 나도 그것의 존재에 신경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이 시간에 이곳에 이 존재를 두고 갔단 말인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나도 난감해졌다. 가장 일반적인 짐작은 동행하기엔 누군가의 몸에 수백 배 달하는 숫자가 주는 무게로 인한 중력 때문이었으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희박한 가능성으로 취객이 벗어 두고 간 거라고밖에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짐작은 틀린 거였다. 아무리 물리학의 성취가 발전했더라도 인간에게 있어 중력이 추위를 이길 일이 없고, 또 취객이라 할지라도 이 추운 겨울에 자기 구두를 벗어 놓고 갔다? 그 구두를 취객이 벗어 두고 갔다고 단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았을 뿐 아니라-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구두는 그냥 벗어 두고 갈 만한 그저 흔한 구두가 아닌 샐러리맨의 한 달 월급과 맞먹는 제법 값나가는 구두라 더더욱 그랬다. 나에게 있어 그 존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았다.
어제 그제, 정확히 주말에 나는 그것이 있어야 할 원래의 장소에서 몇 시간, 아니 2주에 걸쳐 그들의 세계로 돌아다녔기에 그 구두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됨을 단박 알아챘다. 아니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어째 그 구두의 난처한 꼴에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다니, 우라질, 그것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버젓이 당당히 자리를 점령한 채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야 할 그것은 그렇게 처참한 꼴로 나와 맞닥트렸다. 그렇다고 그것의 정체가 완전 새 구두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 번 신었다 해도 손질을 잘해 언뜻 새 구두로 보였다. 그것을 모시고 지옥철을 타는 집사의 통장 잔고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