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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페어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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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안 Oct 31. 2024

페어

#4

유실물 센터는  대리로 있을 때 과장 심부름으로 온 적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사 2층은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파티션 너머로 남자  직원이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리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장을 입고 여자 구두를 들고 온 남자라니, 아마 많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분명 맞으면서도 맞지 않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몇 초의 공백을 뒤로하고 담당 직원은 몇 가지를 질문했다. 습득  장소와 시간, 물건을 발견했을 때의 정황들이었다. 이 구두가 어떤 구두인지 장황한 나의 설명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구두를  살피던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 구두 사이즈가 다르네요? 라며 혼잣말인지 나에게 묻는 말인지 나지막하게 말하며 볼펜으로  기록했다. 사이즈가 달라요? 이 표시가 보이나요? 36과 37이죠? 직원은 나에게 구두의 밑창을 들어 보여 주었다. 오른쪽이  37, 왼쪽이 36이었다. 저렇게 구두를 신으려면 구두를 두 켤레 주문해야 하나? 엥, 그렇다면 멀쩡한 구두 한 켤레를 버리게  되잖아. 아니면 명품이니까 미리 고객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작하는가? 나리를 통해 경험한 세상이 전부가 아닌 정말 발가락만 담근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상한 말들과 함께 담당 직원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혹여 유실물 찾아온 주인이 확인되면 나에게 연락을 꼭  해 달라고, 그렇다고 내가 사례금을 받고자 한 건 아니었다. 물론 직원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무슨  궁금증이 뻗쳤는지 모르지만, 이 구두에 대한 내 궁금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의 구두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승진 3주 차의 나는 승진의 기쁨을 누릴 여유가 없었다. 전략기획부 신사업 TF  팀장.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은 승진이었으나 그렇다고 뭐 달라진 건 없었다. 승진은 승진인데 승진의 부수적인 찝찝함이 따라왔다.  여러 선배와 동기들의 앞담화와 뒷담화를 종합해 보건대 6개월 안에 성과를 내야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는, 힘든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길어야 기획실은 2년이라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평사원부터 차근차근 성실하게 밟아 온 케이스들이었으나 그들은  기획실과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멀어졌다. 

   영업 전략  부서에서 2년도 채 채우지 못했다. 합당한 명분을 든다면 전년도보다 배로 늘어난 영업 실적이었다. 북미와 북유럽의 판매가  생각보다 더 큰 매출을 올려 주고 있었다. 타국의 악재가 오히려 운이 맞은 사례였다. 위기를 기회를 만들 묘안으로 밤을 지새운  결과 마침맞게 내세운 계책이 현상과 잘 들어맞았다고 봐야 했다. 하나, 다른 부서에서도 나 말고도 그런 인물들은 더러 있었다.  그러니 조금은 빗나간 승진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구멍 난 낙하산이라고 봐야 할지 반가움과 동시에 득달같이 밀려든 정체를 딱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심정이  이런데 부서 사람들 표정은 더 가관이었다. 손뼉을 치는데도 손가락에 힘이 좀 빠져 보였고 웃는 표정과 달리 속마음은 온통 복잡한  듯 보였다. ‘왜 굳이 강 과장이지? 왜? 왜?’ 박수가 길어질수록 물음표들이 줄을 잇는 것 같았다. 팀장은 이제 안 보게 돼서  반갑다는 것인지 내 등짝을 힘주어 툭 치면서 어, 이제 강 팀장님으로 불러야 하나? 축하해, 요. 라면서 다소 껄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분명 ‘요’가 2초 정도 늦게 나왔다. 아마, 하반기 때였나? 부서 영업 실적을 끌어 올리느라 삼사일 밤을 지새우며  만들어 낸 전략으로 직원들이 성과급을 받자 최 상무가 김 팀장에게 어깨를 들썩이며 반쯤 포옹하려는 자세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도 백  퍼 진심은 아닐 거라고 여겼지만 예상이 틀린 게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본 순간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재무 분석표의 보고 수치와 하등 내가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였다. 승진도 정량 평가의 결과물, 그래서 언제 지워지고 삭제될지 몰랐다. 이달 초에 출시한 일체형 세탁기와  건조기는 AI 음성 기능이 주요했다. 옷감 손상을 최대한 막아 준 저온 제습 방식도 한몫 거들었다. 하지만 상대 경쟁사가 언제  치고 들어올지 몰랐기에 위에서 신규 아이템에 따른 여러 실험 방식을 요구했다. 두 대를 다른 기능으로 하다가 이제 하나로 뭉쳤다.  전략 회의 때 새내기 P의 제안은 여러모로 요긴했다. 건조기에다 섬세한 부분의 다림질 기능을 추가하자고? 이번 일체형도 구김이 덜  갔지만 좀 더 디테일하게 만들면 어떻겠냐고? 부장도 같이 들었는데 무슨 현실성 없는 소리? 라며 시큰둥한 낯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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