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기자 88, 핸드폰 액정에 88이라는 숫자를 보자 나는 무한과 연속에 조금씩 지쳐 갔으나 그녀의 피로도는 무한계를 가진 듯했다. 뭐, 이 정도면 양호한데, 라는 표정이었다. 하긴 지난주는 대기자 111명도 기다렸다. 2주째 나는 몇몇 백화점의 명품관을 그녀를 따라 헤매고 있었다. 한 켤레의 구두를 사기 위해서!
여기서 살 거지? ‘나는 다소 피곤하지만 너의 선택을 존중해. 그러나 어딘가 앉거나 집에 가서 눕고 싶어. 그러니 빨리 결정해 줄래?’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단호히 건넸다. 아까 LM 매장에서 본 것도 마음에 들었어. 이 매장만 들러보고······. 음, 아까 본 곳이나 여기서 살게. 내 진심이 그녀에게 잘못 전달될 것 같았다. 두 눈을 깜박이며 좀 더 간드러지게 말하는 그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모르면 좀 가만히 있어.’를 애교스럽게 말하는 듯했다.
오빠, 금방 빠져. 그냥 대기 예약해 두고 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대. 우리 카페에서 차 마시며 기다리자.
오늘 그녀의 눈에 꽂힌 것은 발음도 힘든 MB사 제품이었다.
오빠, 이 힐의 곡선 좀 봐. 잔잔한 물결 같잖아. 손에 질감이, 정말 귀여워. 이 바닥의 색감 봐. 바닥까지 색감에 정성을 들일 줄 아는 브랜드니까. 이거 사면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점원이 알려 준 가격의 무게보다 그녀의 눈빛의 무게가 크다는 생각에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내가 별 관심 없이, 상식적으로 알던 샤넬. 구찌, 에르메스, 프라다, 루이뷔통은 제쳐 놓더라도-나는 구두 브랜드가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지만- 발렌시아, 자 디올, 로저 비비에, 지미추, 셀린느, 마놀로 블라닉, 르메르, 미우 미우, 아크네 스튜디오, 메종 마르지엘라······. 이런 매장을 2주간 그녀의 포로가 되어 다녔어야 했다. 간다고 구두를 바로 살 수도 없었다. 대기, 예약, 대기. 그녀의 소박한 한 켤레의 요구는 내 마음을 다박거리게 만들었다.
구두도 구두지만 명품 매장마다 향수 냄새와 금빛이 호기롭게 쏟아질 듯 조명에서 내뿜는 불빛에 나도 모르게 눈이 따가워 저절로 감아졌다. 어찌 된 게 호화찬란함의 극치는 가격이 올라갈수록 걸어야 할 동선은 길어졌고, 전시된 물건들은 사용의 질보다 예술 작품처럼 유니크하게 빛났다. 그래서 만났던 그 구두······ 사람의 두 눈이 마술에 걸린 듯 그 구두를 가슴에 안고 사랑스러워하던 여자들과 지금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자리를 차지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구두가 오버랩 되었다.
나라도 뭔가의 결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음 역에서 후다닥 내리자 나는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그 구두를 찍어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구두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채 1분도 되지 않아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어머머, 우리 아기, 다칠까 봐 마음이 아프네요.’ ‘주인이 잃어버린 것 같은데 꼭 주인 찾아주세요.’ ‘저 구두 이번 시즌에 다섯 켤레밖에 들어오지 않아 못 산 사람이에요? 어디 역이라고요?······.’ 인터넷 커뮤니티에 순식간에 퍼졌는지 쉼 없이 댓글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져 올라왔다. 댓글들을 보자 구두 주인이 찾아가지 않을까 하는 오지랖이 뻗쳤다. 출근 시간까지 15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내릴 때도 거듭 사진을 찍어 둔 나는 재빠르게 구두를 들고 역 유실물 센터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