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남고 말은 사라진다
스텔라와 경임, 환이, 석영 그리고 메이든은 식사를 마치고, 다른 와인을 꺼내 거실로 자리를 옮겨, 소시지 빵, 참치 카나페, 상추 샐러드,
9첩 과일(금귤, 천혜향, 한라봉, 딸기, 단감, 파인애플, 포도, 샤인 머스캣, 멜론)과 함께 후식으로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에스, 아직도 그 미친ㄴ한테 꽃 보내?"
"당연하지. 20년 넘게 사과 한마디 없는데 진심으로 사과할 때까지 해야지. 까먹지 말라고..."
메이든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하고 스텔라에게 말없이 시선을 옮겼다.
"고등학교 때 미술부였긴 했어도, 교양 과목 중에 국어 쌤이 따로 교무실로 불러서 글을 잘 쓰니까 공모전에 참가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추천을 해주셔서
전공과는 별개로 생활 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있으면 좋으니까 투고하려고 [대숲 아래서] 라는 원고를 썼는데, 같은 반에 서보희라는 애가 작가 지망생이었고,
국어 쌤이 지망생도 아닌 스텔라랑 비교하면서 '넌 작가한다는 애가 지망생도 아닌 스텔라보다 필력이 더 구려서 작가 되겠냐, 지망생이 아닌 애도 그렇게 글을
잘 쓰는데 넌 그 이상으로 더 노력해야 되지 않겠냐, 넌 왜 간절함이 없냐, 그래서 작가 되겠냐' 라면서 무시하는 말을 많이 했나 봐."
"핑계지. 그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지."
"그러다 내가 원고를 다 써서 애들도 보여주고 쌤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학교에 가져왔는데, 그날 체육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에 다들 옷 갈아입고 나가니까 교실이 비잖아~ 그때 서보희는 아프다면서 체육 쌤한테 허락도 받았다면서 교실로 들어가더라고.
근데 체육 시간 끝나고 교실로 들어가니까 원고가 없어진 거야. 돈도 아니고 원고를 누가 훔쳐 갔을까 의심보다는 다른 원고를 빨리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원고를 써서 공모전에 투고했는데, 그걸로 최우수상을 받았거든. 근데 대상 받은 걸 보니까 내가 처음 쓴 원고 제목이랑 똑같고
작가 이름에는 서보희라고 적혀 있더라. 내 이름을 지우고 본인 이름으로 수정해서 공모전에 낸 거지. 어이가 없더라.
심지어 그 원고가 어떤 출판사에서 보고 출간 제안을 해서 20살 되니까 책으로 나오고."
"난 젤 이해가 안 되는 게, 공모전은 그렇다 쳐도 책이 나왔을 때는 이건 선 넘는 거다, 우리가 폭로하자고 그렇게 뭐라 했는데
그냥 놔두라면서 가만히 있었던 건지.."
"내가 이렇게 글로 먹고살지 몰랐지. 난 미술로 대학에 갈 거고, 걔는 글로 대학에 갈 건데, 어차피 걔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거고,
난 시카고에서 다닐 텐데, 대학 가면 훔치고 싶어도 내 원고는 못 훔칠 테니까, 그리고 작가가 되면 정신 차리고 지가 지 글을 쓰겠지 한 거지.
내가 걔처럼 국문과를 전공하고 작가가 되고자 했으면 그때 머리채라도 잡았겠지."
"근데 거기까지 했어야지. 적당히 선은 넘지 말았어야지. 그 ㄴ은 지가 똑같이 당하면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개ㅈㄹ 떨 ㄴ이야, 그 ㄴ은~"
"그 이후로도 글은 계속 썼는데 대학 졸업하고 쓴 [미드나잇 블랙] 원고를 대형 출판사가 개최하는 공모전에 투고했고,
그 출판사에서 직접 연락이 와서 출간 제안을 하셔서 책을 냈고, 그 책을 어떤 영화 감독님이 보고 영화로 만드는 게 어떠냐,
잘 찍어 보겠다고 해서 영화로 개봉했고, 그 영화가 잘 돼서 극작가에 이름 올린 나도 얼굴이 알려지고, 원작 소설도 베스트 셀러가 됀 건데,
걔는 그것도 배가 아팠나 봐. 고등학교 졸업하고 4년 만에 SNS DM으로 말 걸어서는 처음엔 '부럽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거냐' 묻더니,
갑자기 '글은 내가 더 잘 썼고 대상은 내가 탔었는데 왜 니가 작가로 잘 나가는 거냐, 양심이 없다, 넌 절실하지도 않지 않았냐,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 면서 막말을 해대길래 '넌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라고 하고 SNS DM 막아 놨더니
그때부턴 올리는 게시글마다 악플을 달더라. 사람들이 하도 그 악플 쓴 사람 고소하라고 난리인데 난 누군지 아니까 그냥 넘겼는데,
갑자기 걔가 지 SNS에 워드로 장문의 폭로 글을 쓰고 그걸 찍은 사진을 올린 거야. [미드나잇 블랙] 원작을 내가 지 원고를 훔친 거라는 둥,
내가 고등학교 때 애들 돈 뺐고 학폭을 했다는 둥, 내가 SNS DM으로 협박을 했다는 둥, 아주 지가 한 짓을 주어만 나로 바꿔서 올렸더라."
"하아...미친 ㄴ, 정신병자야, 정신병자."
"근데 걔가 안일하게 생각한 게, 난 진짜 학교 조용히 다녔거든? 그래도 4년이 지났고, 더 이상 조용히 학교 다니던 내가 아닌데
나도 지처럼 고등학교 때 이후로 자라지 않고 그대로 일 거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나를 만만 하게 봤거나..
SNS DM 처음 왔을 때부터 다 캡처하고, 원고 훔친 증거, 학폭은 걔가 했던 증거, 싹 다 긁어모아 놓고 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내 SNS에도 반박 글 올렸지. 뉴스에도 보도되고, 내 반박 글이랑 증거들을 보고 여론이 내 쪽으로 기울고, 사람들이 걔 SNS에 악플 다니까 댓글 막고,
DM으로도 계속 보내서 DM도 막더니 얼마 안 있다가 계정을 아예 없앴더라. 작가협회에서도 미친ㄴ 취급 당하고, 공모전마다 실격되거나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보내도 반려돼서 지금은 작가 말고 딴 거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몰라, 지금 뭐 하는지. 내가 가장 빡치는 건 그런 짓을 하고도
사과 한마디 없다는 게 너무 괘씸하고,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다 잊고 잘 살까 봐 승소한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더라고.
걔 생일이 진짜 엿같게도 우리 아버지랑 같은 날이어서 그날마다 택배 젤 작은 사이즈 상자에다가 붉은 엉겅퀴 딱 한 송이만 넣어서 집으로 보내고 있어."
"얘도 이런 면에선 쫌 독한 게, 그걸 20년째 하고 있고, 심지어 그 꽃 꽃말이 프랑스에서는 비평가, 불평쟁이, 영국에선 보복, 엄격, 복수, 건드리지 마,
뭐, 이런 뜻이래~"
"사과할 때까지만 하고, 진심이 없더라도 사과 한마디만 하면 그만하려고 했어~ 근데 안 하잖아~"
"저 같아도 그렇게 할 거 같아요. 진짜 미친 사람이네요. 사과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걸~ 어떻게 글 쓴다는 사람이 글은 남고 말은 사라진다는 걸 모르고
그런 짓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되네요."
"그니까~ 지 업이지, 뭐."
"근데 그런 것도 이겨낸 애가 웬 슬럼프?"
"그러게~ 그래서 극복해 볼려고 여기 온 거 아냐~ 그래도 친구라고, 생일 챙겨 준다고 여기까지 와주고~ 고맙다~ 메이든도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뭐야,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알아? 진짜 감동 받았나 본데? ㅋㅋ"
스텔라는 머쓱한지, 코끝을 찡그리며 귓불을 만진다.
"작가님, 혹시 못 먹는 음식이나 알레르기 같은 거 있어요?"
"이게 알레르기 인지는 모르겠는데, 성게알 먹으면 토하고 설사 하더라~ 그리고 못 먹는 거 라기보단 안 먹는 건 있어~ 토마토.
아버지 일 때문에 중학교를 일본에서 다녔는데, 일본어를 못하고 혼혈이라는 이유로 학폭 같은 걸 당했었어. 일본에서는 그걸 '이지매' 라고 하는데,
하루는 책상이 없어지고, 소각장 같은 데에서 버려진 책상 주워 오면, 하루는 의자가 없어지고, 또 가져오면, 사물함에 뒀던 교과서가 다 갈기갈기
칼로 난도질 돼서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고, 한 번은 책상 서랍에 죽은 쥐가 있고, 또 한 번은 가방에 바퀴벌레 수백 마리가 있고,
하굣길에 토마토를 던져대서 교복이고 가방이고 뭐고, 다 토마토즙으로 젖어서 다 버리고 새로 사고, 그때 부모님이 내 몰골을 보고
이지매 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나는 아버지가 외교관이니까 내가 타국에서 사고 치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거고,
나라를 싸잡아서 욕을 해댈 테니까, 일본인들이 내 나라 욕 하는 꼴은 못 보겠어서 계속 참았지. 담임한테 말을 해봐도 내가 욕할 짓을 해서,
이지매 당할 짓을 해서 그러는 거다, 일본어를 못하면 당해도 싸다, 이러니까 해결이 안 됐어.
아버지가 그러더라. 아빠 때문에 참는 거면 그러지 말라고, 아버지가 일하는 것도, 엄마가 일을 그만두고 우리 가족 뒷바라지를 하는 것도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고, 아빠가 바라는 건 니가 행복한 거뿐이야. 니가 행복하지 않으면 우리도 행복하지 않아.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서 참다 참다 더는 못 참겠어서 방학식 날 주동자가 창가 쪽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들어서 창문 쪽으로 던져 버렸어.
다행히 창문이 열려 있어서 깨진 것도 없고, 건물 아래에 아무도 없었어서 다친 사람도 없었는데, 웃긴 건 그 이후로 나보고 또라이, 미친애 라면서 피하더라~ㅋ
그래서 그 이후로 쥐, 바퀴벌레, 토마토만 보면 구역질 나고 속이 울렁거려~"
"물 공포증도 있잖아, 너~"
"물 공포증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리조트 근처에 계곡이 있었거든. 수영장처럼 수심이 일정할 거라고 생각해서 계곡 가장자리에 발을 담갔는데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거야. 그게 수심인 줄 알았지. 그래서 튜브도 없이 그냥 들어갔는데 가운데로 갈수록 깊어지더라.
그러다 발이 안 닿아서 허우적대다가 다리에 쥐가 나니까 허우적대는 것도 못 하겠더라. 계속 물을 먹다가 정신이 희미해질 때쯤 환이가 건져서 살았지.
눈 뜨니까 응급실이더라고."
"생명의 은인이시네요~"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거지. 수영할 줄 알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아니지. 너니까 그런 거지. 니가 내 친구니까~"
스텔라의 말에, 환이는 피식 웃어 보였다.
"너는 알레르기나 못 먹는 거 있어?"
"저는 못 먹는 건 없고 다 잘 먹는데요, 공포 영화 잘 못 보구요. 고소 공포증 있어요~"
"그건 나도 그래~"
"에이~ 형사님이 공포 영화, 고소 공포증은 좀...ㅋ"
"왜~ 형사는 사람 아니냐?"
"ㅋㅋㅋ"
"ㅋㅋㅋ"
"메이든은 마지막 연애가 언제야?"
"저도 최근에 헤어졌어요. 22년도부터 캐나다 밴쿠버 고등학교 교사랑 만났었는데, 지금 있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된 거예요.
그 전엔 캐나다에 있었거든요. 지금 다니는 회사 대표가 캐나다에서 대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인데, 한국에서 회사를 차릴 건데 같이하자고 해서
근무하게 됐어요. 근데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전 여자친구가 힘들어했었는데, 내가 더 잘하면 극복이 될 줄 알았거든요.
근데 내가 더 잘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걔는 내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랬던 거였어요. 그건 우리 회사가 캐나다에 지점을 내거나 제가 출장을 가거나
퇴사하고 캐나다로 돌아가야 가능한 거였으니까. 전 한국에서 친구 회사에 다니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걔도 한국에 저를 보러 올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이고, 나와 영통할 때는 힘들다는 말만 하고, 자꾸 언제 오냐고만 하고, 짜증만 내는데 곁에 있어 주는 친구들,
남사친들 얘기할 때면 생기가 돌더라구요. '아, 이 여자한테 나는 전혀 의지도, 위로도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팍 식더라구요.
그래서 올해 1월에 헤어졌어요."
"장거리 연애..힘들지~ 근데 그건 서로 힘든 건데 서로에게 의지해도 오래 갈까 말까인 게 장거리 연애야.
스텔라도 그렇고 나도 경험이 있어서 여자 입장도, 남자 입장도 너무 이해돼~"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경임이가 장거리 연애를 한 적이 있어?"
"뭐야~ 나만 알고 있으라더니 여기서 이렇게 깐다고?"
"응? 스텔라만 알고 있었어?"
"난 내 얘기 잘 안 하잖아~ 스텔라한테도 안 하려다가 영통하는 거 걸려서 안 거지. 변시 준비할 때였는데, 만나던 사람이 미국으로 유학을 하러 가서
장거리 연애를 2년 정도 했을 때 처음엔 애틋해지는 게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고
심지어는 한국에 왔는데도 연락조차 안 한 적도 있고, 나중엔 영통도 하기 힘들어지더니 갑자기 나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더라.
그래서 그냥 헤어졌어."
"2년이나? 하아..근데 왜 이렇게들 상대에 대한 예의들이 없어? 잘 헤어졌어~ 똥차 가고 ㅂ츠 온다는 말이 있잖아~
ㅂ츠 놓친 건 걔네들이고 너희는 똥차 보냈으니 ㅂ츠 올 거야~"
그렇게 다섯 사람은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친밀감이 높아졌다.
스텔라의 생일 겸 홈파티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아늑한 포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이들의 대화는 10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마치 오래된 친구들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