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라
요트 투어를 마치고, 세 사람의 숙소 앞에 있는 카페 [맨도롱]에서 커피를 마시고 헤어지기로 한다.
"아까 공개 연애 했다는 분은 SNS에서 본 거 같아요~ 가수는요?"
"가수는 33살 때 더 어린 친구였는데 팬덤 층이 두터운 친구여서 월드투어 한다고 1년에 3개월 이상은 아예 한국에 없고,
화보 찍는다, 자체 콘텐츠 찍는다, 뭐다 하면서 또 해외 나가고 하니까 점점 마음이 식더라고~
사실 나는 혼자 집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는데 되려 이 친구를 만나면서 외롭다고 느끼니까, 이건 아니다 싶고,
지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4년 만났어도 그냥 자연스럽게 헤어진 거 같아~"
"저는 대학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일 때 만났던 여친이 바람펴서 헤어졌거든요. 같이 있어도 외롭다는 게 뭔지 알 거 같아요.
데이트를 해도 핸드폰을 손에서 안 놓고 자려고 누웠다고 하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가고 집이라고 하고 클럽에 있고,
계속 거짓말을 하니까 도저히 못 만나겠더라구요."
"야아~ 알고 보니 여기 바람맞은 사람들 모임이었네~ 나는 만나는 여자마다 바람 피고 도망가고, 너도 몇 번 있지 않나?"
"두 번. 27살 때 만난 피부과 의사 ㅅㄲ랑 30살 때 만난 감독 ㅅㄲ. 그래도 그 피부과 의사 ㅅㄲ는 더 어린 88년생 여자랑 바람 난 건
눈곱만큼은 이해가 돼~ 그 감독 ㅅㄲ는 유부녀랑 바람피다 걸려서 헤어지자고 하니까 '나중에 얘기해. 이게 헤어질 일이야?' 이 지ㄹ하더라."
"그 ㅅㄲ들은 재떨이에 코 박고 죽어야 돼. 개ㅅㄲ들"
"피부과는 다른 데 가면 되는데 감독이면 작품 개봉할 때마다 보겠네요?"
"웃긴 게 감독 ㅅㄲ는 얘랑 헤어지고 그 유부녀하고도 헤어진 후에 나온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못 넘기고
관객 수도 이전 영화에 비해 폭망하더니 지금까지도 변변치 않던데~"
"한 5년 전인가? 전화 온 적 있어. 나는 영화사 소속이라 내가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고 회사로 원고를 넘기면
회사에서 소속 감독 중 누가 맡을 것이냐, 외부 감독을 데려올 것이냐를 결정하고 투자자 모아서 예산 정하고
캐스팅하고 촬영 들어가는 순으로 진행되거든, 그리고 보통은 감독들이 자기가 극본을 쓰거나
작가들한테 전화해서 니가 써봐라, 같이 하자, 이런 식인데 반대로 나한테 다음 작품 지한테 맡겨 달라,
회사랑 연결해 달라, 이러더라."
"미친 ㅅㄲ 아니냐, 그거? 이 얘기 듣고 애들 다 얼굴 시뻘게지도록 빡쳐가지고..."
"진짜 뻔뻔하네요. 그러니까 유부녀랑 바람을 피겠죠? 상식 이하 사람인 거 같아요..."
스텔라는 단톡방 알림이 울리자 핸드폰을 확인한다.
"애들 내일 오전에 제주 온다는데?"
"내일 니 생일이니까~"
"내일 생일이에요?"
"응~ 아니, 매년 돌아오는 생일이 뭐 대수라고..."
"이럴 때 챙기는 게 친구 아이가~ 내일 애들 오면 홈파티하자!"
"그럼 장 봐서 들어가야 돼~ 내일 메이든도 와요~"
"저도요? 제가 껴도 되나요?"
"안 될 이유는 없지~"
"좋아요~ 내일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문자로 보내주시면 꼭 갈게요~"
세 사람은 각자 숙소로 헤어지기 전, 스텔라는 메이든에게 대략적인 시간과 펜션 주소를 톡으로 보냈고,
석영은 핸드폰 메모장에 홈파티 음식 리스트를 적고 있다.
[제주 A 풀빌라]
펜션 앞에 차량을 주차하고, 별채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으면서도 홈파티 음식 리스트와 사와야 할 것들을
서로 상의해가며 메모장에 적고 있었고, 리스트가 정해지는 대로 다시 차를 몰고 근처 마트로 향한다.
"내일 애들 몇시 비행기라고?"
"12시 10분 도착이래~"
"그럼 내일 아침 간단하게 먹고 공항에 애들 픽업 갔다가 와~ 난 요리하고 있을게."
"알았어~"
두 사람은 장을 다 보고 펜션으로 돌아왔고, 장 본 것들은 본관 냉장고를 채웠다.
스텔라는 미리 재료를 손질하고, 고기 핏물을 빼거나 육수, 반죽 등 오래 걸릴 만한 것들을 해둔다.
석영도 스텔라를 도와, 양파 껍질을 까거나 마늘 꼭지를 따는 등 잔업들을 한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올려놓고 핸드폰에 연결해, 음악을 재생시켜 놓았으며, 그 음악을 들으며
재료 손질을 하던 스텔라는 오후에 요트 투어를 하면서 메이든과 나누던 대화를 생각한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면서 메이든에 대한 호감이 점점 짙어지는 걸 느꼈고, 서로 알게 된 지는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요트 투어에서의 대화로 인해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으며, 메이든의 말랑한 미소와 입 동굴 그리고 따듯한 성격에 끌렸고,
메이든 역시 스텔라의 보조개와 지혜로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걸 느꼈다.
석영 또한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리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된 핸드폰이 울린다.
스텔라는 핸드폰을 만질 수가 없어서 누구에게서 전화가 온 건지 확인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받는다.
"하이, ㅂ스비~ 전화 받아줘~"
음성인식으로 통화 연결이 된다.
정후
(누나……)
그녀는 첫마디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알았고, 괜히 받았다며 후회했다.
석영 역시,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았다.
>>정후
(끊지 마, 누나...)
"지금 바빠. 통화할 상황 아니야."
(그럼 그냥 듣기만 해. 시간 많이 안 뺐을게...)
"이거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되어 있고 옆에 석영이 있는데 괜찮겠어?"
(난 그냥...누나 내일 생일이잖아...축하한다고...)
"정후야...나는 매년 오는 생일에 무덤덤한 사람이지만, 작년 생일이 자꾸 떠올라서 힘들어…
겨우 잊을 만 하면 니가 이렇게 전화해서 상기시키니까 진짜 미쳐버릴 거 같아..."
(미안해...진심이야, 진짜...미안해, 누나...)
"니가 정말 미안하다면, 이렇게 전화하는 거 그만해, 제발..."
석영이 하던 잔업을 멈추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더니 수건에 물기를 빠르게 닦고는 스텔라의 핸드폰을 찾아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두 사람의 통화를 강제로 종료시킨다.
"작년 생일?"
"묻지 마."
"……말을 해야 알지. 말을 해야 내가 그 ㅅㄲ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할 거 아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묻지 말라고 하면 그냥 묻지 마..."
스텔라의 말에 석영은 말없이 남은 잔업을 계속한다.
-1달 전-
2019년 3월부터 장기 연애 중이었던 스텔라와 배우 서정후
정후는 스텔라보다 4살 연하로, 스텔라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깊은 밤, 푸른 달]에서 주연을 맡았고,
캐스팅이 확정되기도 전부터 스텔라와 감독의 작업실이 있는 [스타라이트 필름스] 사옥에 찾아와,
남자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다며 어필하곤 했다.
캐스팅 확정된 이후, 감독, 작가, 주연 배우들이 만나는 감독 미팅 때 첫 대면을 했던 두 사람
감독 미팅이 술자리로 이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이 점점 서로를 끌어당겼고 교제로 이어졌으며, 마음도,
성격도 거의 모든 게 잘 맞았던 두 사람은 2024년 4월까지 5년 1개월 동안 만났다.
정후가 배우인 만큼 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 그의 팬들이나 기자들에 의해 사진 찍히는 일이 허다했다.
숨기고 거짓말을 하기보단 인정하거나 공개를 하는 편으로 의견이 모아, 공개 연애를 시작했으며,
그의 팬이 SNS DM으로 장문의 욕을 보내거나 게시물 댓글이 욕으로 도배되고, 스텔라가 기자나 잡지사 인터뷰를 할 때마다
스텔라의 작품 질문보다 정후에 대한 질문을 더 집중적으로 하는 등 스트레스 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녀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준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정후의 어머니였다.
정후의 열애설 기사로 모든 포털사이트나 SNS가 도배 되면서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두 사람이 연애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그녀를 본가로 불러, 처음 만나게 되었고, 스텔라가 거실 소파에 앉으려고 하자,
어른을 찾아뵙는 자리에서 편하게 소파에 앉으려고 하냐, 놀러 왔냐는 말을 듣고, 무릎을 꿇은 채 2시간 동안
압박 면접을 받듯이 말씀을 들었다.
그 후로도 1, 2주에 한 번씩 그녀를 불러댔고, 그의 어머니가 어디에 있든, 그녀는 찾아봬야 했으며,
친구들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다 갑자기 그녀를 불러서 계산하라고 하거나 백화점으로 불러서
명품 쇼핑을 하면서 결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 이렇게라도 하면 예뻐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군말 없이 그의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말하는 대로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는 이렇게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부모가 가정 교육을 그따위로 가르쳤냐,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너 따위가 뭔데 감히 탐을 내냐,
너 같은 거한테 뺏기려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줄 아냐, 남의 집 귀한 아들 등쳐먹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헤어지라는 등
폭언을 서슴지 않게 내뱉곤 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모욕적인 말들은 참을 수 있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고통이었으며, 구역질이 날 정도로 힘겨워 우울증 약을 먹기도 했다.
가장 심각했을 때는 결혼을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고부갈등과 시집살이를 미리 겪어야 하나,
발코니 너머로 떨어져도 안 죽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충동적으로 한 적도 있었다.
4년간 이 모든 일들을 혼자 삭히며 참아왔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상이 남친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그녀는 그와 헤어지면 남이 되고 이 모든 상황이 끝나겠지만 자신 때문에 어머니와 정후의 사이가 틀어지면
두 사람의 남은 인생을 괜히 자신이 망치는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녀도 참다못해, 작년 그녀의 생일날, 정후와 데이트를 하던 중, 그에게 이 모든 일들을 최대한 그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표현을 자제하며 조심스럽게 털어놨지만, 그가 처음 들었을 때는 어머니의 이중적인 모습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자신의 엄마 편을 들며, 되려 그녀가 어머니를 거짓말로 모함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그녀를 원망했다.
그러다 자신의 형과 결혼한 형수와 고부 갈등과 시집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형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스텔라를 믿지 못하고 위로하기는커녕, 원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후회하며, 그녀의 집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심한 시집살이를 겪어서 그 화살이 다 아들의 여친, 아들의 와이프한테 향했던 것 같다, 다 무지했던 본인의 책임이다,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어머니의 폭언과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헤어지냐, 못 헤어진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듯,
"난 너의 어머니에게 너의 여친이라는 이유로 사람대우조차 받지 못했고, 우울증 약까지 먹고 있어.
내가 왜 4년 동안 너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참아왔는지 알아? 난 그냥 너랑 헤어지면 그만이고, 그럼 이 상황이 끝나겠지만,
넌 너의 어머니 아들이고, 내가 너랑 결혼할 것도 아닌데 나 때문에 모자지간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잖아. 나 더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
하지만 나랑 헤어지더라도 넌 반드시 이거 하나만 기억하고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거야.
너의 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고부 갈등, 대물림 되는 시집살이가 너의 형수에게서 끝나지 않았고,
미래에 너의 와이프한테 반드시 돌아갈 거라는 거. 너랑 형님은 형수님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절하면서 평생 잘 해줘라.
그분은 나보다 더할 말 많으실 거야."
라며, 매정하게 정후에게서 떠났고, 그게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지도 이제 3개월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몇 번씩 그녀에게 전화하는 정후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미련 때문인지 계속해서 사과하기 위해 전화하고, 받지 않으면 장문의 문자를 보내며,
그녀가 별다른 반응 없이 받아주지 않아도 그의 연락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스텔라는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정후에게 먼저 헤어지자고 했지만, 그와의 이별이 그녀 또한, 힘이 들어,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매일 밤마다 술에 취해 잠들곤 했고, 당연하게도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이 떠오를 리 없었으며,
10년 만에 찾아온 슬럼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를 옥죄었던 상황들로부터 벗어나고, 항상 그녀의 편인 가족들과 오 대표 그리고 늘 그녀의 곁을 지켰던
24년 지기 친구들 덕분에 점점 술도 줄이고, 우울증 약도 끊을 정도로 괜찮아졌다.
이런 그녀에게 제주도에서의 한 달은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고, 큰 의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