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로 남을 재지 마라
<2024년 09월 30일>
AM 10:30
어제의 두통은 사라지고 꿈조차 꾸지 않은 채, 잘 자고 일어난 스텔라가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메이든
(작가님, 몸은 좀 어때요?)
"어..오늘 컨디션은 괜찮아."
(다행이네요~ 오늘 만날까요? 이따 점심 어때요?)
"점심에는 회사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서. 저녁에 보자.."
(아..그럼 제가 작가님 회사로 갈게요~ 이따 몇 시쯤 갈까요?)
"5시?"
(네~ 5시에 작가님 회사 앞에서 봐요~)
"그래.."
통화가 끝난 후, 스텔라는 씻으러 욕실로 향한다.
외출 준비를 마친 그녀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두 달 전에 환이가 주차해놓은 대로 세워져 있는 그녀의 차를 타고
[스타라이트 필름스] 사옥으로 가는 길에는 블루투스를 연결해 음악을 들으면서 이동했다.
사옥의 지하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한 후, 바로 대표실로 올라갔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오 대표가 일어 서며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점심을 먹기 위해 사옥 근처 분식집으로 온 두 사람
두 사람의 단골집이라는 건 분식집 사장님의 반기는 얼굴과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떡볶이, 순대, 튀김을 각각 1인분씩 가져다주고는 다른 떡볶이와는 달리,
스텔라가 어묵만 먹는 것도 알고 있는지, 두 사람의 떡볶이엔 어묵이 확연히 많이 들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으음~ 나 이 집 떡볶이 먹을라고 너 오는 날을 오매불망 기다렸잖아~"
"혼자 먹으러 오면 되지~ 포장해서 집에서 먹어도 되고~ 직원들도 좀 사주고~ 왜 나 올 때까지 기다려~"
"넌 나한테만 T인 거 같어~ F 맞냐?"
"아이구~ 대표님이 작가님 보고 싶었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 구만~ 작가님이 눈치가 없네~ㅎㅎ"
"어머~ 역시 사장님 센스쟁이~!ㅎㅎ"
"아이구, 이런~ 내가 아주 크나큰 실수를 했구만?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담부턴 눈치 챙기게씀다~"
"ㅎㅎㅎ"
"ㅋㅋㅋ"
"오빠랑 언니는 잘 있지? 전화로는 맨날 잘 있다고 하지. 그게 진짜 잘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있나~ 너무 멀리 살어~"
"잘 있어~ 딸내미 오는 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면서~ 공항에서 헤어지는데 매번 울 것 같은 표정이고~"
"그래서 말인데 니가 보낸 계획안,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인 건 맞지만 현실 가능성이 좀 낮지 않을까 싶어~"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대표님이 자신이 없을 뿐이지."
"우이씨~ 정곡만 푹푹 찔러대면 재밌냐? 아직 해외 지점까지 확장할 타이밍이 아닌 거 같으니까 그러지~"
"우리 엄마, 아버지가 딸내미랑 매년 이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우리 고모 손에 달렸습니다~
고모가 처음 우리 회사 설립할 때처럼 용기를 좀 내봐요~ 그때 그 불도저 어디 갔어? 잘 좀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에휴~ 얘가 또 내 마음에 불을 지피네~"
"고모가 영화사 차린다고 했을 때 다들 무슨 여자가 그게 가능할 거 같냐, 회사 하나를 설립하는 게 소꿉놀이인 줄 아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 할 때 난 고민 1도 안 하고 고모라서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초 칠 거면 닥치라고 한 거 기억 안 나?"
"그랬지~ 그때 나한테 그딴 말 지껄인 ㅅㄲ들 지금 다 노후 대비는 개뿔, 겨우 연금이나 타 먹고 있다."
"거봐~"
"일단 기다려봐~"
오 대표와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옥으로 돌아가 그녀의 담당 팀 스케줄 관리자인 다정, 스토리 에디터 나정 그리고 리서치 담당자 도운과 함께
영화 제작 관련 미팅을 하고 있다.
PM 04:40
계속되는 미팅 끝에 스텔라가 먼저 퇴근 준비를 하고, 사옥 건물 로비로 내려가 정문 밖으로 나가자, 바이크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메이든이 보인다.
"빨리 왔네?"
"어? 작가님~ 일이 일찍 끝나셨네요?"
"응..뭐 먹을래?"
"찾아 놓은 데 있어요~ 일단 탈래요?"
메이든은 스텔라에게 여분의 헬멧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헬멧을 쓰고는 메이든의 뒤에 탑승한다.
그녀를 뒤에 태우고 어디론가로 향하는 메이든의 바이크가 멈춘 곳은 사옥 근처 골목 안쪽에 위치한 한식 솥밥 맛집인 [ㅇㄸㄸ]였으며,
매장 옆에 위치한 야외 주차장에 바이크를 세워둔 뒤, 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미리 예약을 해 놓은 메이든 덕분에 길게 늘어선 웨이팅을 뒤로 하고 바로 예약자명을 확인 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의 소파 자리에 앉은 두 사람
각종 솥밥이 메인 메뉴인 곳이라 메이든은 동파육 솥밥, 스텔라는 스테이크 솥밥을 주문했다.
"제주도에서 파스타랑 스테이크를 많이 드셨던 거 같아서 한식을 선택했는데 괜찮아요?"
"솥밥 전문점 같고 좋을 거 같네.."
"다행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혹시..번호 바꼈니?"
"네? 아...제가 가우디 투어 가기 전날에 핸드폰을 바이크 타다가 떨궈서 그대로 아작이 났었어요.
근데 바로 다음날이 출국이니까 일단 대리점에서 임대폰 신청해서 가니까 도저히 작가님 번호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임대폰이라서 톡도 안 되고, 귀국하면 작가님 회사를 찾아가야 되나, 했거든요. 공항에서 작가님 만났을 때 진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근데 너무 차가우셔서 솔직히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제주도 여행 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나 싶고,
그래도 이렇게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대리점 매장 오픈하자마자 가서 임대폰 반납하고 새 폰 사서,
바로 톡 리스트에 작가님 찾아서, 또 바로 연락한 건데..혹시..연락하셨어요?"
"아...그랬구나. 서로 오해하고 있었네. 사실 나 미국 가서도 니가 톡으로 먼저 연락 오겠지 기대했었나 봐.
근데 연락 한 통 없길래. 한참 고민하다가 내가 먼저 한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니까 줌으로 영상 통화 가능하냐고 톡을 보냈었는데 읽지도 않고 답장이 없더라.
제주도에서 항상 칼 답이던 사람이 그러니까 걱정도 됐지만, 사실 나도 너처럼 생각했던 게 더 컸어. 아, 이 친구한테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나?
그냥 제주도에 있을 때 같이 놀 사람이 필요했었던 건가...? 근데 그렇게 읽씹 하던 니가 공항에서 마주쳤을 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반가워하는 거 보고
좀 의아했기도 하고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러웠던 거 같아...연락을 못 받았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뭔가 나 혼자 기대하고,
나 혼자 이러고 있는 게 한심하기도 하고...기분이 좀...그렇더라...그래서 기분이 태도가 됐나 봐...나이값 못 했네, 내가...미안하다..."
"아니에요~!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더 미안해요...전 작가님 미국 본가 가신지 모르고…
저도 가우디 투어 가기 전에 밀린 업무 하느라 바쁘기도 했고…핑계로 들리시겠죠...? 그전에라도 제가 계속 연락을 했었으면
작가님 번호도 어쩌면 외워 두거나 어디 적어 놓기라도 했을 텐데...그럼 그렇게 오해하거나 읽씹 당하는 일도 없으셨을 텐데..."
"이렇게 오해였다는 거 알게 됐으면 됐어~ 퉁 치고 다시 시작할까?"
"네~! 그 전에 번호 좀 찍어주세요~ㅎ"
자신의 핸드폰을 스텔라에게 내미는 메이든
스텔라는 메이든의 핸드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찍고는 통화 버튼을 누른 후, 메이든에게 다시 건넨다.
"자, 이제 진짜 퉁~?"
"네~ 퉁! 아오~ 속이 다 시원하네~ㅎ 공항에서 만난 후로 얼마나 심장 떨렸는지 모르시죠~?"
"미안~ㅋ 내가 아닌 건 정말 딱 아닌 사람이라~ 손절도 빠른 편이고~"
"휴~ 손절 안 당해서 다행이네요~ㅎ"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오해를 푸는 사이, 주문한 솥밥이 나왔고, 처음 매장에 들어섰을 때와는 다른, 다시 제주도에서처럼 편한 분위기로 식사를 하는 두 사람
'공항에서 메이든을 만났을 때,
그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반가워하는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두 달 동안 연락이 없었던 메이든에 대한 실망감이 마음속에서 커져갔고,
그가 이제는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어졌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차분히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른이구나..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사람은 오래 보아야 그 사람을 안다.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되내였지만, 난 아직 멀었구나..
서보희 일을 겪으면서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사람을 속단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머리로는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아직 잘 안된다..
섣불리 메이든을 판단하고 괜히 혼자 오해해서 이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런데 이 오해를 이렇게 대화로 풀고 다시 편해져서 참 다행이다.
이게 가능한 거였다니...'
스텔라는 메이든의 설명을 듣는 동안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가 연락하지 않았던 이유를 듣고 안도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그의 부재로 인해 쌓인 왠지 모를 서운함과 실망감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연락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본인도 바빴고, 또 그녀가 바쁠까 봐 배려하느라 그랬던 거였다는 게 그녀 또한, 그런 마음이었고
너무나도 이해되고 공감 가는 부분이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서서히 풀어졌고, 스텔라는 메이든의 진심을 느끼면서 그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으며,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 속에 조금씩 서로에게 훨씬 더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에서 한잔하기로 한 두 사람
일단은 매장 옆에 주차해둔 바이크를 타고 스텔라의 차를 주차해둔 사옥으로 향했다.
사옥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그녀가 메이든의 바이크에서 내리고는 헬멧을 벗어 그에게 건넨다.
"집에 바이크 두고 작가님 차량으로 같이 움직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래, 그게 낫겠다~ 먼저 가, 뒤따라갈게~"
"네~ 잘 따라오세요~"
스텔라가 그녀의 차에 타고 시동을 걸자, 메이든은 자신의 집으로 먼저 출발했고, 그녀도 그 뒤를 따라간다.
10분 정도 달려서 이태원동에 위치한 한 빌라 앞에 멈췄고, 호수별 지정 주차 구역에 바이크를 세워둔 후, 메이든은 집으로 올라가 헬멧만 두고
바로 다시 나와 스텔라의 차에 탄다.
이태원동에 있는 한 칵테일 바 [ㅋㄹ]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는다.
1, 2층으로 되어 있는 동남아 스타일의 퓨전 칵테일 바로, 특이한 점은 메뉴판이 없어서 일단 자리에 앉으면 직원이 와서 좋아하는 맛 취향에 대해 물어보고
추천을 하면 가격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문을 한다.
칵테일을 검색해서 이름을 알고 있는 칵테일이 있거나 먹어봤던 기억이 있는 메뉴, 혹은 먹어보고 싶었던 게 있다면 일단 그 메뉴를 시켜보는 것도
주문하는 방법 중 하나이며, 두 사람은 달달한 칵테일을 먼저 시켜보고 다른 칵테일을 추가로 주문하거나 대화를 조금 더 하다가 귀가할 생각으로
스텔라는 피치크러쉬, 메이든은 피냐콜라타를 시킨다.
피자가 맛있다는 스페인 사장님의 추천을 받았지만, 저녁을 배불리 먹고 온 상태라 칵테일만 주문했다.
맛이 특별하다기보다는 동남아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주문 방식, 그리고 각종 칵테일마다 플레이팅이 남다른 특별함이 있는 곳이었고,
두 사람은 추가로 마티니와 시나몬 향이 은은하게 나는 갓파더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플로 대리 기사를 부른 상태고, 스텔라의 차량 앞에서 대리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 기사가 도착했고, 대리 기사가 운전하는 그녀의 차량 뒷좌석에 탄 두 사람은 기사님 때문인지 조금은 어색해진 분위기로
메이든의 집까지 이동했다.
그를 집 앞에 내려 주고는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메이든의 집에서부터 그녀의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까지 완료한 대리 기사님은 어플로 결제 확인을 한 후,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그제야 그녀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때, 스텔라의 핸드폰이 울린다.
>>메이든
제주도에서 같이 밥 먹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오늘 뭔가 첫 데이트 하는 느낌이어서 설렜어요.
작가님은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잘 자요~:)
스텔라는 메이든에게서 온 톡을 확인하고는 환한 미소로 답장을 한다.
<<메이든
나도 그랬어~
우리가 처음 만난 게 3개월밖에 안 됐는데도
되게 오래 만난 사이처럼 편하기도 했어~
메이든도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