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자랍니다
나도 여자랍니다
봄비가 꽃잎처럼 내리는 날이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팔마체육관에서 열리는 국제유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단체예약을 하였다. 전직 유도선수 남편의 인맥으로 순천에서 경기가 열리는 해마다 선수들이 우리 모텔을 찾는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스타렉스 3대가 연이어 외부주차장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하나 둘 모습을 보이는 국가 대표 선수들.
“금메달 리스트 안바울 선수, 안창림 선수다. 은정아 사인 받을래? 사진도 찍어!”
남편이 특정 선수들에게 찡긋하자, 그들은 사인을 한 후 포즈를 취한다. 생전 처음 보는 선수들에게 받은 사인지를 책 사이에 포개어 놓는다.
남편은 코치와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방을 안내하기 위해 한 선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실명은 거론하지 않겠다. 유명한 선수라 누를 끼쳐선 안되니까)
커다란 망치가방을 든 왼 팔에 드러난 핏줄은 잘 포장된 고속도로처럼 굵고 선명했다. 어깨는 다리미로 다려 논거 마냥 180도로 반듯했고, 오래 다져진 근육은 헬스장에서 만들어진 인공근육과는 모양새가 다른 자연산 활어처럼 탱글탱글했다. 탄성이 좋아 보이는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찌르면 지구밖으로 튕겨져 나갈지도 모른다.
내 몸이 팝콘기계라도 된 걸까? 두근대는 심장이 팝콘처럼 팡팡 터진다. 나대지 마 심장아!
607호로 선수를 안내했다.
그동안 모텔을 하면서 다양한 남자 손님들을 보았다. 10~70대 전 연령 층. 그중에 진짜 잘생긴 사람, 스타일 좋은 사람, 훤칠한 사람 등등 외모가 출중한 수많은 남자들이 스쳐갔으나,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사랑이 뭐였더라?
나는 내 안에 사랑은 소멸한 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종의 사랑은 잊었다. 오래전 바람이 문을 열고 나가듯 존재조차 희미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니 내가 살아있었구나 새삼 느꼈다. 낯선 쾌감! ‘눈요기’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내 마음은 하나의 색깔로만 칠해져 있지 않다는 것.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 마음 한편에 불꽃이 일거나,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내 안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게 꼭 그 사람과의 관계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내 삶의 소중한 조각일 수도 있다는 거지.
헐떡이는 호흡이 진정되기도 전에 프런트에 전화벨이 울린다. 방금 올라간 선수의 바로 옆방인 606호에서 충전기가 되지 않는다며 교환을 요청했다. 충전기를 들고 다시 6층으로 향했다. 봄바람이 가득한 날이었다. 606호로 향하는 길 갑자기 바람에 열려버린? 열린? 열려버린으로 하자. 그래, 바람에 열려버린 607호의 현관문. 그리고 샤워 후 젖은 머리를 하고 거의 벗은 몸으로 앉아 있는 선수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선수와 나는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머릿속에서 기억이 떠나질 않았다. 나보다 열 살 이상은 어릴 텐데... 선수를 남자로 느낀 건가? 이 느낌 뭐지?
남편은 보수적인 사람이다. 내가 꿈에서 남자 연예인과 사귀었다는 말을 하면
“잤냐?”
고 묻는 허황된 질투쟁이다.
말을 해? 말아? 고민하다가 결국 오후에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말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어디선가 술을 진탕 마시고 돌아왔다. 침대 위에서 갑자기 팔베개를 해준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른 팔을 45도 안쪽으로 접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내가 국댄(국가대표선수)데… 내가 국댄데… 누가 누굴 찾아. 국대가 여기 있는데… 흐흐흐흐 잉”
남편의 팔꿈치 아래로 굵직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쳇!
내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쓸모없는 알음.
바람이 한 방향으로 불어도 시원하듯이 내 안의 사랑이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고 남편은 아직 날 사랑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