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으로부터 사람 10.
엄마, 너무 보고 싶어.
아들이 대빵이를 묻어 주고 으아앙, 울음을 터뜨리며 뱉은 첫 말이었다. 슬퍼, 불쌍해, 속상해 같은 말은 아니었다. 이런 감정들은 내 안에 늘 자라고 있어서 언제고 툭, 튀어나온다. 그래서 마음이 어둡지만 덤덤하다. 그런데 어딘가에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갑자기 물리적으로 사라졌을 때, 사진이나 그림 따위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로 직접 보고 매만질 수 없을 때,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참 낯설다.
보고 싶은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보고 싶다는 말이 얼마나 무겁고 값어치 있으며 고마운 일인지를 죽음으로 가르쳐 준 몹시 보고 싶은 사람들.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누구의 죽음을, 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득하고 깊은 슬픔을 너도 느끼겠지. 보고 싶어도 절대 볼 수 없다는 걸 알아가겠지.
아파트 단지 풀숲에 가면 수도 없이 널린 사마귀 중 한 마리를 키우면서 그것의 죽음이 이렇게 크게 마음속에 자리 잡을 줄 미처 몰랐다. 차오를까 봐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던 오래된 죽음들을 상기시킨 것이 고작 사마귀였다니.
가족 동반 캠핑을 마치고 아들과 단둘이 주문진으로 향했다.
여기에 두면 되겠다. 바닷물에 휩쓸리면 위험하니까, 이 풀숲에 두자. 차에 두면 너무 더워서 질식할 수도 있어.
바닷가 해변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서 대빵이에게 수영을 가르치겠다는 아들을 말리며 픽, 하고 웃어넘겼다.
대빵이 케이지 안에는 캠핑지에서 잡아 온 여치, 매미, 대벌레, 귀뚜라미, 메뚜기 등 열 마리가 넘는 곤충들이 섞여 있어서 마치 움직이는 작은 곤충 박물관을 보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케이지에는 참나무에서 채집한 호전적인 사슴벌레들이 싸우고 쉬고 싸우고 쉬고, 여전히 엎치락뒤치락 중이었다.
무궁화꽃이 예쁘게 핀 나무 아래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알맞게 그늘이 드리워져 곤충들이 쉬기에 딱 좋아 보였다. 그곳에 두 개의 케이지를 나란히 놔두고, 우리는 폭염에 찌든 몸으로 넘실대는 푸른 수평선을 향해 달려갔다. 아들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대빵이에게 들리지 않을 인사를 외쳤고, 아마도 대빵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장에 매달려 사랑하는 반려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두세 시간쯤, 신나게 해수욕도 하고, 모래성도 쌓고, 모래찜질도 하면서 몸이 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중간중간,
엄마 대빵이는 잘 있겠지?
하는 아들의 걱정에,
잠시 다녀올까? 시간이 좀 길어지네. 아니다, 텐트 밖 풀숲에서도 잘 있었는데 무슨 일 있겠어.
하며 몇번 고민을 하기도 했다. 샤워를 마치고 차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은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대빵이를 부르며 번개처럼 달렸다.
야! 이 자식들! 하지 마!
아들은 사슴벌레 케이지를 발로 차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케이지 뚜껑의 작은 틈으로 기어들어 간 일본 왕개미 수십 마리는 사슴벌레들을 둘러싸고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픈 듯 귀찮은 듯, 개미보다 몇 배나 큰 녀석들은 이리저리 거칠게 움직이며 저항하고 있었다. 다행히 개미들이 사슴벌레의 단단한 갑옷을 뚫지는 못한 것 같았다. 개미들을 다 쫓아 보낸 아들은 씩씩거리며 몇 마리의 개미를 발로 밟았다.
안 돼! 죽이지 마!
사슴벌레를 괴롭힌 건 괘씸했지만, 아들의 발길질에 힘없이 납작해지고야 마는 작고 작은 것들이 안쓰러워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소리가 나왔다.
왜 우리 사슴벌레들을 괴롭혀!
아들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 개미들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우리 둘은 대본에 쓰여 있는 지시문처럼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후, 대빵이 케이지로 눈을 돌렸다.
엄마, 이거 왜 이래? 대빵이 왜 이래? 다 어디 갔어?
처음으로 모유가 아닌 이유식을 먹었을 때의 표정, 태어나 처음으로 곱게 간 사과를 먹었을 때의 그 표정.
어린 존재가 느끼는 생애 첫 경험의 경이로움은 기쁨보다는 의아함이었다. 이게 뭐지, 대체 이게 뭐란 말이야? 하는 그 표정을 아직도 나는 종종 본다. 만으로 고작 한 자릿수 나이인 어린이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의아함 투성이의 세상에 살고 있다.
아들 손에는 배가 반쯤 사라져 축 처진 대빵이의 사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슬픔보다는 의아함이었을 것이다.
엄마, 얘 왜 이래? 몸이 왜 이런 거야?
아들은 내 눈앞으로 대빵이를 들이밀었다. 반쯤 먹힌 곤충의 사체를 보는 것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던지, 순간 나도 모르게 아들의 손을 쳤고, 대빵이는 힘없이 땅으로 훅 떨어졌다. 그 몸 위로 다시 일본 왕개미 떼가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케이지 안에 있던 모든 곤충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딱 한 마리, 대빵이만 당랑권 자세로 두 앞다리를 얼굴 앞으로 모은 채, 몸의 반을 개미에게 먹히며 버티고 있었다. 사마귀의 배는 가장 연약해서, 감염되거나 터져 죽는 일이 흔하다. 아마도 개미들은 제일 먼저 부드러운 대빵이의 배를 사정없이 먹어 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빵이는 끝까지 도도하게 공격 자세를 취하며, 케이지 뚜껑 틈으로 들이닥치는 수백 마리 개미 떼에게도 굴하지 않고, 자기보다 더 크고 단단한 녀석들이 흔적도 없이 먹힐 때까지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
아들은 죽은 대빵이를 얼른 손으로 잡아 들고는 사정없이 개미들을 밟기 시작했다.
엄마, 대빵이 좀 봐봐. 엄마는 겁쟁이야! 왜 보지도 못하는데!
엄마도 같이 밟아! 개미들 내가 다 죽이고 갈 거야!
엄마, 흑흑흑, 그런데 엉엉엉, 대빵이가 이렇게 됐는데 흑흑흑, 동화는, 어떻게 쓸 거야?
눈물범벅이 된 아들은 한 손에 대빵이를 들고 한 손으로는 내 귀를 잡아당기며 작고 낮게 말했다.
아들의 부탁 반, 자의 반으로 사마귀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고 있었다. 아들은 놀이공원에 갈 때보다 더 신난 표정으로 매일매일 원고를 읽고 쫑알쫑알 의견을 내주었다.
엄마, 곤충 게임장도 써 줘. 내가 이 모든 곤충하고 신나게 보드게임도 하고 닌텐도도 하고 간식도 먹고 그러는 장소도 만들어 줘. 아 그리고 엄청 다양한 먹이들을 매달아 놓고 대빵이한테 곤충 과자 따먹기도 시킬 거야.
아, 그건 쫌.
아들은 한 장 한 장 글이 늘어날 때마다 손바닥에 대빵이를 올려 두고 동화를 읽어 주었다.
대빵아 봐봐, 우리 엄마가 네 얘기를 쓰고 있어! 어때, 신나지!
나는 두 마리의 귀여운 생명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아들은 아마도,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를 잊고, 죽어버린 대빵이의 동화가 끝이 날까 봐 너무 속상하고 슬펐던 것 같다.
엄마가, 잘 이어 써 볼게. 거기에선, 대빵이는 절대 죽지 않아. 엄마가 꼭 살릴게, 꼭.
아들은 대빵이를 손바닥에 누이고, 서서 한참을 울었다. 하필 노을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푸른 수평선과 붉은 하늘이 만나는 그 지점을 바라보면서 나도 괜히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아 입을 꾹 닫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