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운대역에서 내렸다. 해리단길을 따라 동백역 방향으로 걸어 올랐다. 12월의 부산이 이렇게 추운 곳이었나. 나도 부산에 내려온 지 3년이 넘었다. 그간에는 이 정도로 추운 겨울은 기억에 없다. 겨울에는 검은색 롱패딩이다. 패션피플이야 이런 거추장한 복장을 즐기지 않는다지만 생존피플에게는 이만한 게 없다. 그래도 조금은 예쁘게 보이려고 롱패딩에 달려 있는 모자에 갈색털이 사자의 갈기처럼 탐스런 옷을 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그것도 물에 빠진
카레 빛 고양이처럼 엉성하게 털은 빠졌고
숨은 죽어있다.
얼마간 걸어갔다. 보인다. 큰 교회 옆에 회색에 검은 유리창이 있는 카페였다. 옆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주차장 입구가 동굴처럼 붙어있다. 난 차도 없으니 아직 저 밑의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큰 유리로 된 문에 붙어 있는 나무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잔잔한 재즈가 들렸다. 제목도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카페에 오면 이런 음악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책을 읽을 때도 일부러 유튜브에서 카페 매장 음악을 검색해 들으며 읽는다.
"효롱씨 여기예요."
카페 제일 안쪽에 큰 갈색 네모난 테이블에 분홍님이 앉아 있었다.
사실 효롱이나 분홍은 본명은 아니다. 으레 온라인으로 모임을 자주 하다 한 번씩 실제로 만나는 모임들은 본명보다 닉네임을 쓴다. 그래서 나는 효롱이고 그녀는 단지 분홍일 뿐이다.
"좀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그렇게 잘 안되네요."
"충분히 일찍 오셨는데요. 효롱님은 직장이 여기서 멀잖아요. 저야 바로 이 앞에 있는 병원에 일하니 그런 것뿐이죠."
귀 살짝 밑으로 오는 단발머리를 한 분홍의 옆에는 벗어 놓은 두꺼운 핑크 패딩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민트색 폴라티를 입고서 다른 회원들을 기다리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해운대에 독서모임 할 카페가 너무 없어요. 이런 언덕까지 올라와야 하니 힘드셨죠?"
"아니요. 이렇게 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게 어디예요. 밑에는 다 돌아다녀봤잖아요."나는 롱패딩을 벗어 적당한 빈 의자에 걸쳐 놓으며 말했다.
"잠시만이요. 먼저 음료 주문하고 올게요."
나는 짐을 내려놓고 붉은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채로 카운터로 갔다. 카페에 오면 항상 시키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분홍님은 오늘 병원은 괜찮으셨어요?"
"너무 괜찮아서 문제죠."
"너무 괜찮으면 너무 좋은 거죠. 문제가 될 수 있는 가요."
"오늘 제가 진료를 본 환자가 10명입니다. 너무 한가하죠."그녀는 말하고 난 뒤 목이 탄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분홍님은 소아과시죠. 하기는 안 그래도 뉴스에서 아기가 없다. 소아과로 아무도 안 가려고 한다 들은 것 같아요."
"제가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애국자가 될 것 같아요. 얼마나 한국의 미래가 걱정되는지. 이대로면 머지않아 한국은 진짜 소멸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이사장님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시고 오늘 아침 회의에서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 피켓 하나 만들어서 길거리에 나가야 할 판이에요. 여러분들 사랑하세요. 이렇게요" 그녀는 양손을 피켓을 든 사람처럼 잡고서 말했다.
그러나 몇 번의 모임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 스스로도 비혼이다. 어찌 보면 자신이 그 문제의 구성원 중 하나 일터다. 그래도 그녀의 답답함 또한 사실이니탓할 필요는 없다.
일전에 비혼에 관한 발제가 있어서 질문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왜 비혼인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이게 좋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뭐가 그렇게 좋냐고 하니, 집에 자기가 원하는 성을 쌓고 살면 되는데 누군가를 왜 들어오게 하냐고 했다. 누군가 같이 산다면 그건 이미 자신만의 성이 되지 않는다 한다. 본인의 부모님도 챙기기 바쁜데 다른 사람의 영역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트레스에 예민하기에 애기도 당연히 계획이 없으니 자신의 삶은 비혼이 맞다고 한다
정말 그녀는 자기의 성에만 있어도 외롭지 않을까?
그녀가 아파서 서러울 때나 속앓이를 하고 싶을 때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건 사실 나도 고민이기에 할 말은 없다. 이 문제는 쉽게 생각해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은 모임에 집중해야 하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회원 명단을 봤다.
"오늘은 둥둥 님이랑 반초 님은 못 오신다고 하죠?" 나는 물었다.
"네. 그러게요. 1 퍼센트님이 오신다고 했어요. 아 잠시만요."
알림 소리에 나와 그녀는 독서모임 단톡방을 봤다.
1퍼센트 : "죄송합니다. 책 보다 시간을 생각 못했네요. 이제 곧 출발하겠습니다."
그녀는 카톡으로 아래와 같이 답했다.
분홍 : "괜찮습니다. 이미 효롱님은 모여있고요. 셋이 단출한 모임이니까 천천히 오시면 됩니다."
"1 퍼센트님은 변리사 시험 준비 중이시라고 하셨죠?" 분홍님에게 물었다.
"네. 작년부터 준비했는데 작년에 한번...."
그녀는 말하며 약지 손가락을 들었다가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렸다
"그러면 공부하는 게 낫지 않나요? 괜히 모임이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한데요." 내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저번 모임 끝나고 한번 얘기해 봤는데 지금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게 우리 독서모임뿐이더라고요. 지금도 봐요. 일요일에도 공부하다 나오잖아요. 저도 해봐서 아는데 오히려 계속 방에서 책만 보면 손해예요. 일부러라도 주말에 한 번씩은 나와서 바깥공기를 쐬야죠. 우리 모임도 한 달에 한 번이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심히 공감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아이가 사라지는 한국 사회도 문제지만 독서가들이 사라지는 독서모임부터 걱정해야겠어요. 주위에도 점점 책 읽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게 추워지는 겨울 기온처럼 팍팍 체감이 될 정도인 것 같아요." 나는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렇기는 해요. 죄다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죠. 영상 길이도 점점 짧아진다고 하더라고요. 동영상에 익숙해진 세대들이 글자만 있는 책은 얼마나 따분하게 느껴지겠어요. 어쩌면 우리는 이제 멸종 보호받아야 할 천연기념물 같은 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고 살며시 윗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죠. 제 주변에만 해도 책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모임에 나와야 겨우 한 달에 한 번 이야기하는 정도니까요."
그렇게 이곳 카페에 멸종 인간 1호와 2호는 앉아서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읽는 의사가 1호, 공무원이며 작가인 내가 2호. 그렇게 만든 조그만 우리들의 보호구역인 독서모임, 해운대 독서살롱이 오렌지색 조명 아래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