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패딩에 회색 목도리를 한 분홍이 말했다. 어느 때보다 친절한 목소리다. 왜 난 불안을 느끼는 걸까? 해운대역 카페 앞에서 만나 길을 걸었다. 어제밤부터 세상이 낯선 느낌이다. 세상이란 부드러운 수건이 갑자기 까칠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 사람들은 조금씩 풀리는 날에 맞춰 이른 새싹이 올라오듯 붐비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바다를 향해서.
"효롱님은 잘 하셨어요. 방장으로 매번 감사해요. 진행을 아무도 안 하니 혼자 맡아서 고생하셨어요."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차가움을 굳이 찾아 느꼈다 . 그녀의 감사하다는 말이 마지막 내리는 눈 같았기 때문이다. 두근
"아니예요. 분홍님께서 있어줘서 해운대 독서살롱이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책 읽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에 해운대에 이런 수상한 독서 모임을 함께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 분홍님 덕분이지요."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지그시 아직 먼 바다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 웃음은 묘한 애잔함이 느껴졌다.
"효롱님. 저 사실 많이 힘들었어요."
항상 당당하고 굳세보이기만 했던 분홍이 말했다.
"모임을 시작할 때, 그 때 사실 많이 안 좋았어요. 어머니께서 암으로 많이 아프셨거든요. 한국에서 할 수 없어서 외국까지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나는 그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봤다. 오랫동안 모임에서 봤지만 생각해보니 개인사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스럽기만 했던 분홍이였다
"그랬나요? 미안해요. 전혀 눈치채지 못했네요. "
"아니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니예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이예요."
"제가 그럴 자격이 있나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요."
우리가 해운대 해수욕장 입구로 걸어가니 몇 마리의 비둘기가 바닥에 앉아 있다 날아올랐다.
"아니요. 전 독서모임에서, 효롱님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저의 못난 투정도 다 받아준 곳이 해운대 독서살롱이였어요.
집에서는 제가 가장 역활을 해야하니까요. 나이 많으신 부모님께 애기같이 굴어도 강해져야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저희 집은 딸만 둘 있는데 언니도 서울에 있어서, 제가 가장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런 애 같은 제가 말이죠. 초등학생한테 갑자기 집안의 기둥이 되라는 거죠.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전 정말 나이만 먹은 사람이거든요."
나는 아니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진지한 눈빛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은 말보다 듣는 것이 그녀에게 더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슬픈 내 눈빛을 보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안보셔도 됩니다. 어머니는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어요."
"아.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이요."
"고마워요. 효롱님은 그것 아세요? 참 좋으신 분이라는 걸요? 효롱님을 보면 정말 말뿐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요."
"제가요? 전 매일 실수만 많고 어설픈 사람인데요. 남자들 다 하는 운전도 못하는 바보같은 사람이죠. 그래도 신경쓰지 마세요. 아시다시피 저는 괜찮아요. 그런 저라도 난 퍽 좋아하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예요."
그녀의 답변에 내가 김빠진 웃음을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나는 이 상황이 우스워서 더욱 크게 웃다 결국은 둘은 깔깔깔 웃었다.
한참을 웃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걱정되네요. 효롱님이 긍정적인 사람이지만 아픔은 함께 오거든요. 그게 눈처럼 계속 쌓이기만 하면 튼튼한 지붕 이라도 무너질 수 있잖아요."
나는 잠시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불그스레 변한 태양이 수평선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바다는 사방으로 뻗치는 햇살을 받아 함께 물들고, 동백꽃 같은 붉은 잔물결이 일었다.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되요. 괜찮아요. 걱정말고 말씀하세요. 분홍님이 제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압니다."
그녀는 결심을 한 건지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말했다.
"일단 어젯밤 보셨죠? 모임 사람 다 나간 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다른 회원을 통해 은연중에 알고 있었어요. 풍진님이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잖아요. 아예 새로 만들어 회원님들을 다 데리고 가신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게 그렇게 된 거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풍진님이 즐거워 보인다고 좋아했구나. 그것도 모르고 오픈 채팅방에 올리면서 글쓰기도 함께 해보라 했구나. 아마 눈치 빠른 다른 운영진들은 확정되지 않은 나쁜 말을 못하고 담아두었던 것이리라.
갑자기 난 바보같은 내가 더욱 바보같이 느껴졌다. 고마웠다 말하며 떠난 사랑이라도 그건 이별인것이다. 헤어짐은 아픈 것이니까.
그녀는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 했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저도 그렇고 남아있는 3명 다 그런 효롱님이 좋아 남아있는 거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 수는 없어요. 변할 필요 없어요. 그런 부분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부분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필요는 없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