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순진하게 사는가?

#8 우리 동네 수상한 독서모임이 있다

by 효롱이

싸움은 필요 없지만 신념은 필요하다. 아주 가끔은 굽힐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효롱님 이 귀중한 시간에 나와서 또 이 얘기하기 싫네요." 미간을 찌푸린 분홍이 말했다. 언제나 이렇게 말할 때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저도 분홍님 귀중한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죄송하긴 한데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보통 때와 다르게 눌리지 않고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혀를 차며, 손을 위로 들며 말했다.

"참 평소에는 순한 분이 왜 이 부분에는 고집을 그렇게 피우세요. 우리가 명색이 독서 모임인데 책을 안 읽고 오는 사람을 참석시킬 수 없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그래야 준비도 해오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잖아요."

난 나름 최선을 다한 응수에 힘이 다해 차가운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했다. 그녀는 똑 부러지게 말하지만 마음속은 퍽 여리다. 이렇게 힘내서 말하면 줄곧 져주는 것이다.


"분홍님 말씀도 이해하지만 전 우리 해운대 독서 살롱이 뭐랄까. 그냥 따뜻한 모닥불 같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사회는 냉정하죠. 모두들 지쳤어요. 전 제가 작고 바보 같은 사람인 거 잘 알아요. 그래서 우리 모임에 오는 사람을 그냥 따뜻이 바라봐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무엇인가 요구하기 싫어요. 조금이라도 어깨를 가볍게 했으면 해요. 죄송해요."

"알았어요. 더 이상 말은 안 할게요.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마음이 효롱님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은 드네요. 그럼 다음 모임 때 뵐게요."

그녀는 무엇인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걱정스레 나를 보았고 우리는 짧은 회의를 마치고 돌아섰다.


이번 달 모임에도 둥둥이님은 참석하지 못했다. 분홍과 나 그리고 반초님과 1퍼님은 참석하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 외에도 3명이나 더 왔다. 두 분은 이전 모임에 한번씩 나오셨는데, 그래도 싫지는 않으셨는지 이번에도 참석하셨다.

다른 한 분은 오픈채팅 방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정기모임에는 처음으로 나오는 것이다. 닉네임은 풍진이며(*닉네임은 가칭으로 바꾸었음), 여성분이셨다. 그간 채팅창에서 보면 그녀는 톡톡 튀면서 자유로움이 풍겨 나오는 사람이었다.


나, 분홍님, 반초 님 이렇게 세 사람은 일찍 자리를 잡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필기구를 정리해서 나누고 미리 출력한 종이를 적당히 반짝이는 테이블 위에 얹어 두었다.


"분홍님 인원이 그래도 많이 늘었네요. 매일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것보다 새로운 회원 분들이 오시면 새로운 주제가 많이 나와서 뜻깊죠?"

오래간만에 신입들이 많이 오니 기분이 좋은지 반초보님은 어깨가 올라갔다. 꼭 조그만 교실에 전학생이 오는 듯한 떨림이다. 나는 혹시나 카페를 잘못 찾을까 봐 링크를 다시 올렸다.


딸랑-

문이 열리고 여성 한분이 들어왔다. 그녀는 빛나는 광택의 블랙 래더 덕다운 패딩을 입고 있었고 몸에 달라붙은 밝은 청바지에 검은색 워커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풍진님이다. 첫 봐도 상상하던 풍진님 그대로기에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안 쪽에 있는 우리를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쾌활하게 오른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밀려와 그녀의 긴 생머리가 흔들렸다.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등장이다.


"안녕하세요. 해운대 독서 살롱 맞죠?"

우리는 얼결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딱 보니 알겠더라고요. 얼굴에 적혀 있어요. 책의 고풍스러운 향기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하하"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테이블의 중앙 자리에 앉았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2명의 회원들도 왔는데, 두 분은 다 수줍음이 많아서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앉았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발제를 진행할게요. 오늘의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죠. 섬세한 필체로 주인공의 내면의 성장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그럼 책이 어땠는지 감상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나는 내용이 은유적이고 어려운 책이라 최대한 편하게 진행하기 위해 소감 말하기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안 읽어도 가볍게 생각할 거리들을 발제로 진행했다. 새로 오신 회원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용이 어려워서 그런지 까만 밤 중에 나를 바라보는 부엉이 두 마리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풍진님은 그보다도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데, 마치 사냥감을 살피는 야수의 노란 눈동자 같았다. 난 어젯밤, 일이 있어 잘 못 잤는데, 낯선 분위기다. 진행도 평소보다 흐름이 잘 이어지지 못했다. 정신이 어지럽다.


어눌하게만 진행하다 시간이 다 되었다. 반초님과 분홍님은 책이 독서모임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은데 고생했다고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평소는 이대로 집에 가지만 새로운 회원도 왔고 아직 우리들과 이야기를 많이 못한 터라 카페에서 가까운 치킨집으로 갔다.


식당에서 치킨이 나오자마자 선뜻 풍진님이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눈은 가늘게 뜨며 말했다.

"효롱님 수고하셨습니다. 분홍님 그런데 처음 나왔는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데 혹시나 소개해도 될까요?"

분홍님은 그런 요구는 처음이라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눈치 없이 말했다.

"네. 오픈톡에도 올리세요. 독서 모임 안에 여러 가지 소모임도 다양하게 한다면 회원님들도 더 즐겁지 않을까요?"

이미 내뱉은 말이라 분홍님은 더 이상 말을 안 하고 치킨을 포크와 집게로 찢고 있었다.


"아. 그렇겠죠. 효롱님 감사합니다. 그럼 글쓰기 모임은...... 뭐라 뭐라....... 등등 이렇습니다"

한참을 신나게 풍진님은 말했다. 모임보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더 많은 말을 하신 것 같았다.

난 오늘 내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한 분이라도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때 반초님과 분홍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난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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