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사장을 따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은 느렸다. 그녀가 밟을 때마다 찰흙에 발 모양이 찍히듯 눌렸다. 족적 하나하나가 마치 내 가슴을 누른다.
"효롱씨 괜찮나요? 안색이 안 좋아요."
"괜찮아요. 갑자기 걸었더니 몸이 살짝 어지러울 뿐입니다."
나는 애써 무거운 발을 들어 성큼성큼 걸어 그녀앞에 걸었다. 갑작스러운 큰 보폭에 모래 먼지가 일었다.
효롱아. 그 정도는 아니잖아. 왜 그래. 네가 그렇게 소심하게 굴면 그녀가 할 말을 못 하잖아. 약하게 굴지 마. 그냥 몇 명 사람들이 나간 것뿐이고. 아직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냥 흔한 일상을 이야기할 뿐일 수도 있어.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연기가 통했나? 그녀는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유심히 보고는 말을 이었다.
"효롱씨 내 꿈이 뭔지 아세요?"
"개원이오? 언젠가는 해야 하는데 겁이 나서 시작을 못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와. 제가 그런 말까지 효롱 씨에게 했나요? 효롱님이 정말 편한 사람이긴 한가 봐요. 하지만 그전에 작은 소망이 있어요. " 바닷바람에 그녀의 단발머리가 찰랑였다.
"쉬고 싶어요."
"네? 휴식이오?"
"진료하랴 간병하랴 많이 지쳤어요. 호롱님도 그렇고 모임에서 따뜻한 말 많이 듣고 힘내서 나도 좀 쉬어도 되겠다 결심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그런데 좀 시기가 안 좋네요."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분홍님. 제 걱정 마세요. 반장이라고 매일 나오시지 않아도 돼요. 다음 달은 혼자 한번 진행해볼게요."
나는 애써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1년이요."
나도 모르게 앞서가다 멈춰 뒤로 돌아보았다. 그녀도 서서 나를 가만히 보았다. 당찬 그녀는 지금까지 기억에 없을 정도로 쓸쓸해 보인다.
한 달 빠진다는 말이 아니었다. 1년이다.
그리고 찬찬히 한마디 더 했다.
"어쩌면"
나도 몰래 그 말을 따라 했다. "어쩌면?"
"그 이상이오. 저도 사실 정확히는 몰라요."
나는 왜 같이 모임을 해운대에서 계속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세상이란 바람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부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제주도로 갈 생각이에요. 부산 집을 정리하고 가는 것은 아니에요. 흔히 하는 1년 제주도 살이를 해보려고 해요."
나는 알았다고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아마 바보 같은 얼굴일 것이다.
죽도록 힘을 내서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해운대 독서 살롱을 잘 지키고 있을게요."
과연 가능할까? 나 혼자?
그녀는 한참을 나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다 돌아갔다. 오늘 밤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난 멍하니 걷다 보니 집으로 가지 않고 늘 하는 독서 모임을 하는 카페 앞으로 왔다. 들어갔다.
따뜻한 유자차를 시켰다. 자주 앉는 친근한 자리로 가려는 찰나, 카페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저기. 죄송한데 올해 여름까지만 카페를 합니다. 손님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네? 무슨 일 있나요?" 나는 의아해 물었다.
"저희 카페 문을 닫거든요. 보시다시피 손님이 너무 없네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보니 사장님 살이 많이 빠지셨다. 볼이 홀쭉해졌다.
"알겠습니다. 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획하시는 일 잘되시길 바랄게요."
갑작스러운 지진에 집이 무너진 것만 같다.
나는 유자차를 들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손을 덜덜 떨며 자리로 갔다. 털썩 소파에 파묻히듯 주저앉았다. 퍽 하고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뭐지. 기다렸다는 것처럼 일들이 일어났다. 반장은 제주도로 가고, 모임 사람들은 다 나갔고, 힘들게 구한 모임 장소는 폐업을 한다.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물로 샤워했다.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봤다. 어떤 것도 예상한 일이 없다. 몸은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럴 때는 글을 쓰면 마음도 평온해지고 잠도 잘 들었다는 생각났다. 펜을 봤다. 검은색 펜과 노란색 메모장이 있다. 나는 펜을 들었다 다시 놓았다. 에이 귀찮아
매일 쓰던 글이 의미 없어 보였다. 내가 뭐 하는 것인지 바보같이 글만 적고 있다. 나 하나 옹골차게 살지 못하는 놈이 무슨 실한 글이 나오겠나. 지금까지 적고 있던 것은 비웃으며 빠져나가려는 글들을 억지로 손아귀에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매일
올리던 브런치 글도 올리지 않았다. 이제 지친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는 글은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내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글들의 슬픔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일까. 얼마간의 사람들은 응원하겠지. 마지막 마라토너에게 보내는 동정의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