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브리즈번 공항에서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고 수평을 유지하자 사람들이 일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기내의 화면에는 호주 북부의 해안을 고도 36,000피트에서 날아간다고 표시되어 있다.
유년 시절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동경하다 비행기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신비스럽다. 가족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는 있을까.
가족의 얼굴이 보고 싶고 그리운데 아내와 아이들은 그간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까. 일상의 사소하고 소박한 사연이 그립다.
비행기에서 오랜만에 모국어로 된 신문과 방송과 사람을 만나자 반가움이 앞선다. 지난 10일 동안 컴컴한 동굴에 갇혔다가 동굴 밖의 밝은 햇살을 만나는 심정이랄까. 내 나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타자 마음은 벌써 인천공항에 도착한 기분이 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행지에서 한국인을 만난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나 음식점이나 바닷가 해안을 거닐 때마다 귓전에 한국말이 들려왔고 한국인도 만났다.
비행기로 11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까지 찾아오는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 출근해서 오전 10시쯤이면 머리가 맑아지듯이 내 몸의 주기도 커피 한잔을 마시고 음악을 듣자 기분이 맑아진다. 이제야 몸의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 같다.
잔잔한 음악은 머릿속의 생각을 실타래처럼 풀어주는 자극제다.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일수록 그 노래를 들으면 옛 추억이나 슬픔이나 아름다운 생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밝혀주는 것은 빛과 소리다. 기체 밖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태양은 숭고한 세상으로 안내하는 연출자이고 노래는 무에서 생명체를 느끼게 하는 원형질이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태고적 인간을 그리워하는 소리가 담겨있다. 그동안 책도 읽지 못하고 글도 한 편 제대로 쓰지를 못했다. 여행의 일정에 쫓기느냐 일행과 밤마다 술을 마시자 몸은 몸대로 게을러졌고 마음은 마음대로 늘어졌다.
그리고 단체라는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나약함과 하루하루 무리에 휩쓸려 다닌 나날이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이번 여행에서 건진 것은 서툰 솜씨나마 하루하루 느낀 감정의 조각을 비망록에 적어 놓은 조각이다.
비록 비망록에 적은 메모가 인생을 빛내줄 작품은 아니지만, 여행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집에 도착해서 비망록에 적어 놓은 감정의 조각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기행문을 써볼 생각이다.
지금껏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을 다니며 기행문을 써본 적이 없다. 이번 여행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고 준비한 것이다.
기행문이 제대로 마무리될지 아니면 의도한 것과 다르게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 여행을 다니면서 보고 듣고 맛본 감정의 조각을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값진 일이다.
일행과 단체로 움직이는 빠듯한 일정에서 버스와 호텔과 비행기에서 틈나는 대로 보고 느낀 감정의 조각을 그때그때 비망록에 적어 두었다.
사람의 생각은 하루가 지나면 바뀌고 잊어버린다. 따라서 여행을 마치고 여행지에서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국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순간순간 기록해서 그들을 한 울타리로 가두고 연결하는 작업이 기행문이다. 어쨌든 이번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먼 곳을 다녀왔고 많은 기록을 남겼다는 마음에 더할 수 없이 행복하다.
일행과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든다. 비행기가 인천에 도착하면 일행과도 헤어져야 한다. 기내에서 아름답고 비장한 선율 사이로 감정의 숲을 이리저리 헤집고 있다.
가냘픈 음악의 선율 사이로 삶에서 느꼈던 기쁨의 날과 돌아가신 아버지와 가족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아왔던 날들이 춤을 추면서 너울거린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남은 인생이 소중하듯이 하늘을 유영하는 비행기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가는 인생의 여정을 생각하는 중이다.
뉴질랜드 호텔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스와 로마를 여행하면서 쓴 ‘먼 북소리’를 읽으며 그가 글을 쓸 때 감정을 표현한 것이 떠오른다.
사람은 비움과 채움의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감정을 토해낸다는 말을 의미 있게 읽었다. 사람들은 작가는 아무 때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도 감정의 준비 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다.
글도 어느 정도 감정이란 밀물이 가슴에 차오르고 그 감정을 토해내려는 감정이 차올라야 글 밭이 열린다. 비행기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비망록에 끄적거리는 것도 감정의 밀물이 어느 정도 차올랐다는 증거다.
감정이란 느낌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나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비행기의 좁은 좌석에 앉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정의 조각을 밖으로 표풀해 내는 중이다.
지금 비망록에 적는 감정은 깊은 사색을 거쳐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감정과 여행이 끝나가는 마음을 정리하고자 펜을 들었을 뿐이다.
현재 시각은 10:55분. 비행기가 호주를 벗어나기 직전의 해안가를 날아간다는 것을 화면에 표시해 놓았다. 브리즈번 공항에서 남극의 바람을 등지고 북극을 향해 올라가는데 호주를 서서히 벗어나 인도네시아 해협을 향해 날아간다.
비행기에 타서 괴로운 것은 기류 차이로 인해 기체가 흔들릴 때다. 비행기가 몹시 흔들리면 마음이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든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푸른 하늘과 땅에서 바라보던 푸른 하늘이 대조적이다.
땅에서 바라볼 때 하늘이 무변광대하게 보였는데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바라보니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삶에 대하여는 아쉬움과 그리움을 갖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가 살던 나라 밖을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마음이 되자 나라의 소중함과 그리움이란 연정이 생겨난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는 물설고 낯선 곳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일행을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혹여라도 외톨이가 되어 낯선 나라의 이방인 신세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여행하는 내내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고 여행지를 가서도 진중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12:00분. 비행기가 호주를 벗어나 인도네시아 상공을 날아간다. 비행기 안내 화면에 고도 11,582m를 시속 817㎞로 날아가고 있다고 안내한다. 태평양에서 인도네시아를 지나면 필리핀 해협으로 접어든다.
비행기가 북극을 향해 갈수록 마음은 왠지 모르게 바빠진다. 기내에서 이어폰 채널을 바꾸자 옛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온다. 삶이란 눈앞에 마주한 것에 대한 선택의 연속이 아닐까. 그 선택이 삶을 신명 나게 하고 때로는 슬픔과 좌절을 겪게도 한다.
기내의 승무원들이 부지런히 비행기 기내를 오고 가면서 면세품을 판매한다. 지금 무언가를 사야 할 것도 없는데 남들이 승무원에게 이것저것 주문하니 그에 덩달아 내 마음도 바빠진다.
옆 좌석과 앞뒤에 앉은 사람들이 면세품을 주문하는 것을 바라보니 마음이 허전하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사주고 싶은 것도 없는데 남들이 물건을 사는 것을 바라보는 신세가 초라하다.
지금의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건만 남들과 같이 선물을 사지 못하는 마음이 삶을 구차하게 만든다. 선물이란 받는 사람의 마음과 색깔을 맞추어야 하는 정성의 표시다.
뉴질랜드에서 가족에게 전할 간단한 선물을 샀지만 허전하기 그지없다. 내가 준 선물을 받아 들고 기뻐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다. 선물은 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등하게 실려야 한다.
해외여행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딘가를 갔다 왔다는 마음의 표시나 징표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지에서 아이들을 위한 선물은 준비하지를 못했다.
첫 해외여행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여행지마다 마땅한 것이 없어서다. 선물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징표이자 선물을 사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야 한다.
그런데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마주한 것은 그 나라의 특산품은 없고 대부분 중국에서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여행지에서 만든 특별한 것을 선물로 사주고 싶었는데 적당한 것을 찾지 못했다.
비행기 기내의 TV에서 ‘각설탕’이란 영화를 상영한다. 영화에서 말이 새끼를 낳는 장면을 나오는데 사람이나 동물이나 탄생에는 신비스러움과 알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생명의 탄생은 유전자의 물줄기를 이어가는 증거이자 징표다. 지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구상의 모든 것은 탄생이란 두 글자에 의해 생명의 대를 이어갈 것이다.
비행기 기내에 불이 들어와 다시 펜을 들었다. 삶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시차를 줄여 보고자 여행지에서 느꼈던 설렌 감정을 기내에 앉아 비망록에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털어내며 날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