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가(亡父歌)

by 이상역

내 인생에서 나란 사람을 그래도 인정해 주고 잘 알아준 분은 아버지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열정과 목숨을 바친다. 그만큼 아버지는 내게 크든 작든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덩치에 비해 약간 옹고집이 있으셨다. 옹고집이란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한번 옳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뜻을 굽히지 않은 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드리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드렸고 학교에 다닐 때도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니면서도 모내기나 추수와 같은 큰일이 있을 때면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도와드렸다. 농사를 돕기 위해 시골에 갔다 오는 것은 성장하면서 겪은 삶의 과정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농사보다 아들의 얼굴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자주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절 안 골짜기에 올라가 담뱃잎을 따서 지게에 지고 땀을 흘리며 경운기에 싣고 내려오거나 산직골 논두렁을 바르며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던 삶은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시골집 대문을 열고 안방에 들어서면 어머니에게 동동주를 내오라던 목소리다. 그 술자리는 바깥세상에서 겪은 세상사에 대한 인사 겸 안부를 묻는 자리였다.


아버지와 술상을 앞에 두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가족 중에 그래도 좀 횟수가 많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술상을 앞에 놓고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슬프고 괴로웠던 시간이 가슴에 촉촉하게 녹아들었다.


아버지 앞에 앉으면 감정이 누그러지고 외지에서 느꼈던 고독하고 외로운 기운이 포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술상을 앞에 두고 행동과 처신에 대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저 아들과의 만남에 더 의미를 두신 것 같다. 아버지는 자식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술상을 앞에 두고 하셨다. 그러다 술이 거나해지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말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고려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마도 그런 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자식들이 아버지와 함께 하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어느 정도 술이 거나하게 오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셨다.


언젠가 그런 아버지가 미워서 시골집을 뛰쳐나와 청주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 청주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 언젠가 시골에 갔더니 이웃집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웃집에 가보니 아주머니 회갑 잔치로 동네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돌아와 잠을 자려고 하는데 아버지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더니 대뜸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 “세상 똑바로 살아라.”라는 말과 함께 당신이 가슴에 품고 있던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셨다.


사람을 혼내려면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러니 처신을 똑바로 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혼내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다짜고짜 윽박지르듯이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러잖아도 술을 마신 탓에 감정이 격해지면서 그 자리를 버티지 못하고 안방 문을 박차고 나와 한밤중에 청주까지 육십여 리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본래 아버지는 마음이 여린 편이다. 당신으로 인해 자식이 마음을 다치면, 자식에게 서운했다거나 말이 좀 과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통해 미안한 감정을 전달해 왔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자식의 감정을 상하는 말씀이나 꾸중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감정을 읽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하는 분이다.


아버지의 그런 성격이 내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나도 가끔 다른 사람에게 싫은 감정이 생기면 마음에 담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하는 버릇이 있다. 좋지 않은 성격이지만 버릴 수도 없다.


아버지는 시골에 살면서 팍팍한 삶을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식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읽거나 제대로 이해해주지도 못했다. 시골은 농사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궁벽하고 외진 곳에서 마을 이장만 이십 년 하셨으니 매일 같이 재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 사람들과 지내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한평생 농사만 짓고 살다가 2001년 초겨울(음력 10.23)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그리운 생각이 나면서 가슴에는 이별의 한이 쌓여가고 눈가에는 슬픔의 눈물이 솟아났다.


이별의 슬픔은 언제나 이승에 남은 자의 몫이다. 이승을 떠난 사람은 슬픔을 느낄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남은 자는 그 사람이 남기고 간 슬픔과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승을 떠난 사람이 남긴 것은 산 자에게 삶의 무거운 짐과 그림자를 덧씌운 회한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당뇨로 고생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불찰도 있지만, 아버지가 당뇨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돌아가시기 몇 해 전이다.


아버지는 덩치도 크고 체격이 좋으신 분이다. 시골에 갈 때면 가끔 진천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가거나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당뇨가 심각한지 몰랐다.


뒤늦게 남동생에게 아버지를 충주호 근처에 폐교를 개조해서 당뇨 환자를 치료하는 건대병원에 입원시켰다. 내가 아버지를 입원시켜 드리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 동생에게 부탁했다.


건대병원에 전화해 보니 그곳에서 2주 동안 인슐린을 투여하는 방법을 배우고 퇴원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그 병원에서는 인슐린을 투여하는 기계를 몸에 부착하고 식사 전에 인슐린 투여하는 것과 혈당을 검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병원에서는 환자 스스로 당뇨 수치를 재고 인슐린을 투여하는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게 해서 퇴원을 시켰다. 당뇨는 췌장에서 인슐린이 적게 분비되거나 말초조직에서 인슐린 작용이 감소하여 포도당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병이다.


당뇨병은 심하면 손과 발이 썩거나 합병증으로 진행된다. 건대병원은 식사 전 혈압과 혈당을 검사하고 소주 한두 잔은 마시도록 가르쳤다. 당시 나는 대전국토관리청에 근무하던 시기인데 업무적인 일로 충주에 갈 때마다 일을 끝내고 아버지 면회를 갔다 왔다.


한 번은 병원에서 아버지를 면회하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다음에 올 때는 양주 한 병을 가져오라고 부탁하셨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끼리 돌아가면서 자식에게 부탁해서 양주를 가져와 저녁에 마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며칠 후 양주를 갖다 드렸다. 아버지가 건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면회를 가기 위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충주댐 모퉁이를 막 돌아서 걸어가면 아버지가 운동장에 나와 댐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식이 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숨기려고 병실에 들어가서 태연하게 맞이하셨다. 아버지가 자식을 만날 때 하는 첫 말씀은 “바쁜데 무엇하러 왔느냐?”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이 말씀은 겉으로 표현하는 것과 반대로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뜻이다. 내 자식들도 혹여 내가 나이가 들어서 혹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나는 괜찮다. 면회 오지 말아라”라고 말하면 내가 괜찮은 것이 아니라, 자주 면회를 오라고 부탁하는 것이니 올바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자식이 부모를 찾아오는데 누가 마다하고 거절하겠는가. 부모와 자식은 일 년 열두 달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친밀한 관계다. 오히려 만남을 자주 가질수록 정이 들고 서로 간에 알지 못하던 마음의 간격도 좁힐 수 있다.


사람들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말에 절대 동조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한평생을 연구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의 바다다.


그런 깊은 뜻을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전화나 편지로 자주 연락을 해드렸어야 했는데 너무나 무심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충주 건대병원에서 2주 동안 몸에 인슐린 기계를 달고 인슐린 투여와 당뇨 수치를 검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퇴원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돌이켜보니 건대병원에 입원해서 인슐린을 투여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 것이 오히려 일찍 돌아가시게 하지 않았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건대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킨 것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해 드린 일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해 드리고 싶어도 해 드릴 수 없고, 맛있는 음식을 사 드릴 수도 없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저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당뇨 치료를 받기 전에는 혈당이 높아 술 마시는 것을 자제했다. 그러다 병원에서 식사 전 술을 마시는 것을 배우고는 퇴원 후에 술 마시는 양이 점차 늘어나더니 당뇨 치료를 받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 남들은 건강을 위해 식사를 하고 나서 술을 마시는데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식사는 아예 하지를 않으셨다.


아버지에게 술은 몸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원인이자 세상에 남은 생명을 단축하는 끈이었다. 결국에 아버지는 뇌동맥 출혈로 쓰러져 소방차를 타고 진천병원을 거쳐 청주병원까지 갔지만,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이튿날 돌아가셨다.


사람은 생로병사 과정을 거쳐 죽음의 세계로 돌아간다. 지금도 아버지의 마지막을 제대로 배웅하지 못한 것이 슬픈 회한으로 남아 있다.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도 한번 받지 못한 채 홀로 자식과 이별이란 말도 나누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가족과 눈도 마주하지 못하고 이별이란 말도 남기지 못한 채 홀로 먼 곳으로 떠났다. 그것도 아무런 힘도 없는 어머니와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여가며 대화의 눈길조차 주지도 못한 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이 자신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인생은 무언가를 자식에게 내어주고받고 할 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아버지란 역할은 삶의 보금자리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올바르게 자식들이 성장하도록 몸과 마음을 길러주면 그만이다. 인생은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무엇을 주고받는 문제를 수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자주 듣던 말이 생각난다. 당신 가족들을 보면 부모님에게 정이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은 것 같지도 않은데 시골에 무슨 일이 있으면 팔 남매 모두가 모이는 것을 보면 신기하단다.


아내의 말에는 계산적인 생각이 깔려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사랑을 많이 받고 적게 받은 것을 따져가며 만나는 관계가 아니다. 부모는 자식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고 그 환경 속에서 각자가 스스로 성장해 가면서 하나하나 배우는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대전에서 충남대 대학원 수업을 끝내고 유성에서 지도교수와 저녁을 먹고 둔산동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유성에서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제수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제수씨는 아버지가 쓰러졌으니 청주로 오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작은 형수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청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 제수씨한테 전화를 받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작은 형수님 전화를 받고는 다리가 후들거려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허둥거렸다. 정신이 멍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아 운전을 할 수 없어 차를 잠시 길가에 세우고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청주병원으로 차를 운전해서 달려갔다. 청주병원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이미 모든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유지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누워 계신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명해지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얇은 국방색 담요를 덮은 채 누워계셨고 손과 발을 만져보니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몸에서 느끼는 온기의 유무에 따라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온기가 있으면 生이요 없으면 死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뵙고 주변을 둘러보니 가족 모두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몸이 튼튼하던 아버지가 쓰러지다니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모든 것이 허망하고 허탈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형들과 매부에게 아버지를 다른 병원에 옮겨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의사가 더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며 병원에서 하루만 더 지켜보자고 하셨다.


그리고는 가족 모두가 병원에서 대기할 수 없으니 어머니와 큰형과 누님만 남고 모두 집에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대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를 않았다. 하룻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뜬눈으로 지새우고 날이 터오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서 며칠간은 병원에서 버틸 줄 알았는데 의사가 혈압이 너무 떨어져서 도저히 가망이 없으니 집에 모시고 가라고 했단다. 그리고는 청주병원으로 오지 말고 시골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대전에서 아버지 생전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서둘러 시골집에 도착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다.


참담한 마음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허망함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삶이란 무엇일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아무런 준비와 예고 없이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 하는 회한이 밀려왔다.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회의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긴 다지만 이렇게 허망하고 슬픈 날이 찾아오고, 준비 없이 맞이한 이별 앞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삼일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초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진천에서 직장에서 이웃 마을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뿌려놓은 인연과 흔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장터 밭 위 야트막한 언덕에 모시고 나자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슬픔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제는 이승에서 아버지의 웃는 모습은 만날 수가 없다. 아버지를 만나려면 사진이나 옛 추억을 떠올리며 꿈속에서나 만나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언 십여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내 가슴에는 커다란 기둥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아버지의 환영과 그림자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가 없다. 이승에서 이별은 떠나간 사람의 그림자까지 잊어버리는 것이라는데 아직은 그림자가 가슴 깊숙이 각인되어 새겨져 있다.


시골에 가도 두 분이 사시던 공간에서 한 분이 빠져나가자 집안 분위기가 썰렁하고 쓸쓸해졌다. 아버지를 머릿속에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듯이 어스름한 저녁에 달빛에 비추는 그림자를 통해서라도 한번 보고 싶다.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지만, 아직도 가슴에는 강한 자국으로 남아 있어 이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월에 부대껴만 가는 삶에서 무언가를 알만한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세상이다.


아버지란 그림자는 인연의 업보처럼 시골집과 가족과 선산을 지키면서 환영처럼 곳곳에 깃들어 있다. 최근에 꿈속에서 아버지를 종종 만난다. 당신의 생전 모습과 농사를 짓던 시절의 환영이 자주 나타난다.


이제 아버지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뿐 현실에선 만날 수가 없다. 아버지란 자리는 그런 것이 아닐까.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자리가 비워지면 가슴의 한쪽을 예리하게 훑고 지나가는 그런 자리가 아닐까.


시골집에 가도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게 되자 가슴에 큰 기둥 하나가 없어진 것처럼 허전하게 다가온다. 아버지와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와 사연은 먼 훗날에 다시 한번 천천히 돌아보며 진솔하게 그려보고 싶다.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석탄 백탄 타는덴 연기만 펄썩 나고요 이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라는 ‘사발가’ 노래나 목청껏 부르면서 즐겁게 웃으면서 회상하고 싶다.


오늘 밤에는 꿈속에서 아버지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곳에서 잘 계시는지 이웃과는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지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아버지와 술상을 앞에 놓고 막걸리 한잔 따라 드리며 집안의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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