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by 이상역

지난 시절 한때 가수 김수희가 부른 '정거장'이란 노래가 젊은 군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와 같은 세대라면 군대의 내무반에서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듣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이다.


마대 걸레를 손에 움켜쥐고 노래 반주에 맞추어 내무반 바닥을 박박 밀거나, 비가 내리는 날 내무반 앞에서 군화를 닦으며 즐겨 부르던 노래가 정거장이다.


그 시절 이 노래가 군인들에게 왜 인기가 있었을까. 아마도 정거장이란 장소적 배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거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다.


정거장은 군인에게 그리운 부모님을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자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다.


'떠나가면 눈물을 짓고 돌아오면 미소를 짓는 바람처럼 스쳐 가는 수많은 얼굴 안녕이라는 인사를 하며 다시 올 날 재회를 두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먼 기적소리…'라는 노랫가락처럼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면 미소를 짓고 이별할 땐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는 곳이 정거장이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도 정거장처럼 수많은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장소가 있다. 정거장이란 이름 대신 민원실이란 간판을 내걸고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담당자와 만남을 연결 지어 준다.


민원실이란 간판을 내걸었지만, 정거장처럼 버스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곳은 아니다. 자신의 온갖 사연을 전화로 물고 오거나 손에 서류를 들고 터벅터벅 찾아온다.


버스 기사는 정거장에서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주선하지만, 민원실은 민원을 통해서 담당자와 국민이 얼굴을 맞대면하는 낯선 만남과 헤어짐을 주선한다.


그리고 때로는 민원실에서 서로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 고성이 오고 가고 흥정도 한다. 더해서 민원인의 온갖 사연도 들어주고 원망과 한풀이도 들어줘야 한다.


그런 정거장 같은 민원실 옆 구석에서 나도 더부살이로 자리를 얻어 지내는 신세다. 민원실 역할만은 못하지만, 건축과 관련한 온갖 이야기를 들어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국민에게 민원실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여 다양한 민원을 처리하지만, 민원실보다 상담실이란 간판을 내걸고 안내를 해주는 것이 나을 듯싶다.


정거장 같은 민원실은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찾아오는 누구나 받아주어야 하고, 싫다고 떠나는 사람은 붙잡지 못하는 곳이다. 게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사연을 물고 와서 말을 해도 받아줘야 하고, 정치인에 대한 욕을 하거나 정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도 묵묵히 들어줘야 한다.


민원실은 전국에서 전화로 신세타령과 하소연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주어야 하고, 내 것 네 것 따지려는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정거장 이곳은 너와 나의 인생이 있는 곳 여자 여자 여자인 내가 기다려야지'라는 정거장의 노랫말처럼 정거장에는 너와 나의 만남이 있듯이, 민원실에는 너와 나의 인생의 고달픈 애환과 만남이 있다.


민원실에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원성과 불만을 끝없이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민원인과 담당자가 얼굴을 붉혀가며 목소리를 높이고 고성이 오고 간다.


종종 자신이 가져온 민원에 정답을 주지 못하면 기관장이나 부서장을 데려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민원인과 매일같이 삶의 전쟁을 치르는 곳이 민원실이다.


오늘도 민원실 구석에 앉아 민원실을 찾아오거나 전화로 물어오는 민원인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중이다. 마치 태풍이 몰려오는 폭풍전야의 밤처럼 긴장한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가수 김수희의 '정거장'이란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려 본다.


아침에 업무가 시작되기 전에 정거장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어느 소녀의 기도처럼 ‘오늘도 무사히’라는 간절함을 담아 조용하게 하루의 문을 열어젖힌다.

이전 11화진화하는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