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흰 눈을 밟으며 출근길에 나섰다. 하얀 눈이 쌓인 길을 걸어갈 때마다 발밑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오랜만에 눈을 밟아본다. “뽀드득뽀드득” 밟으면 밟을수록 커지는 소리. 내가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 올라와서 삶의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 돛단배일까.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것만 같다.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변했다. ‘흘러가는 것은 세월과 바람과 시간인 줄만 알았는데 사람도 바뀌면서 흘러가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노라.’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하룻밤이 지나면 새 아침이 밝아오듯이 하루가 지나면 내일이란 새로운 오늘이 다가온다. 우리는 매일 마주하는 것에서 날마다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배가 항구를 떠나는 것은 목적지인 다른 항구에 닿기 위함이다. 사람도 하루라는 삶의 바다에 나서는 것은 어딘가에 정착해서 하루라는 시간을 기대고 머무를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서다.
공원의 오솔길 옆 나뭇가지에는 흰 눈이 소복하게 앉아 있다. 눈을 한 아름 안고 있는 나무가 멋있게 바라보이지 않고 삶의 힘겨움과 고통의 무게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런 나무의 삶과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지나가는 겨울바람과 따뜻한 햇볕이다. 바람과 따듯한 햇볕을 만나려면 그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
바람이나 따뜻한 햇볕은 아무 때나 불어오거나 찾아오지 않는다. 때와 시간이 되어야 어디선가 불어오거나 나타난다.
사람은 고통이 들어서면 밖으로 내치려고만 할 뿐 나무처럼 짊어지기를 싫어한다.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려면 때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잠시도 고통이란 쓴 약을 곁에 두려 하지 않는다.
나무나 사람이나 고통은 삶의 아름다운 과실이자 열매다. 고통은 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숙한 과실로 숙성한다. 그런 고통이 기억이란 저장고에 오래도록 남는 법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고깝게만 생각하지 말고 순순히 가슴에 받아들여 보라. 분명 거기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열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희망을 낚아 올릴 수도 있다.
겨울에 흰 눈이 내리는 것은 흰 눈을 통해 새로운 마음가짐과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라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 겨울은 고독하고 외로운 계절이다.
겨울의 추위가 깊어갈수록 봄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겨울은 따뜻한 봄을 기다리게 하는 인내의 시어머니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지나가야 따듯한 봄이 오듯이 우리는 지금 고독한 겨울의 동면에 빠져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흰 눈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었듯이 우리도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 이 시대의 아픔은 서로를 끌어안지 못하는 얇은 가슴이다.
우리는 서로가 배척하는 경계심에만 익숙할 뿐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끌어안고자 하는 따스함과 보살핌에 서툴기만 하다.
사람은 진정 미워하는 사람을 가슴에 끌어안을 수는 없는 존재일까. 사람들은 미워하던 사람이 죽으면 그저 안타깝다 서글프다 시대의 큰 기둥을 잃었다는 수식어만 겨울바람에 뿌려댄다.
이러한 모습이 진정 우리가 해야 하는 행위이고 말들인가.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올가미를 스스로 만들면서 가슴에는 배척과 불신을 끌어안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겨울에 하얀 눈이 내리는 것도 눈을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것도 자연의 질서이자 이치다. 그 현상에 의미를 규정짓고 세월에 빗대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언젠가 소설가 조정래가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의 판매 부수가 신기록을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인터뷰한 것이 기억난다.
노년인 소설가에게 인생을 읽을 수 있듯이 그분을 통해 우리도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문학의 진정한 힘은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끌어모으는 힘이다.”라고 한 말이 가슴에 무겁게 다가왔다.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사회적인 비중이 달라진다. 아마도 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남들은 그저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을 텐데. 문학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자 “아하! 그렇구나.”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 오늘날 문학의 힘이자 현실이다.
우리 문단을 이끌어가는 기둥 같은 분들이 계셔서 마음이 든든하다. 유럽의 고전문학이 오늘날까지 세상에 풍미하게 된 것은 작품의 우수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보편성 추구에 있다.
더불어 그것을 문학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해 준 독자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우리도 흰 눈이 내린 겨울에 우리 문학이 가야 할 진정한 자화상이 무엇인지를 한번 돌아보고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