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이 내리면

by 이상역

하늘에서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면 고향집의 다락방에 올라가 무언가를 찾던 때가 생각난다. 고향집의 다락방은 뜻하지 않은 만남과 호기심을 해결하는 추억이 서린 곳이다.


다락방은 온갖 잡동사니가 모인 그야말로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한 천국이었다. 다락방을 뒤지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전문학과의 만남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같은 고전을 다락방을 통해 만났다. 그 책을 손에 들고 호기심에 책장을 넘기며 밤을 새워 읽노라면 책에서 고유한 향기가 솔솔 풍겨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추억은 고등학교 시절 하숙집에서 우연히 만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오자 방바닥에 겉표지가 뜯어진 채 색이 바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무슨 책일까 하고 집어 들어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다 보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었다. 그 소설의 줄거리는 아직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학창 시절에는 서점에 가서 문학책을 사서 읽을 형편도 도서관을 찾아갈 여유도 없었다. 내 삶에서 문학은 『설국』이란 소설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드문드문 다가왔다.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문학책을 사달라고 조른 적도 없다. 삶을 살아오면서 뜻하지 않게 인연이 닿을 때마다 문학을 접하게 될 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청춘의 시름을 달랬다.


특히 재수하던 시절 대학에 다니는 사촌 형이 빌려오는 문학책을 많이 읽었다. 청주의 허름한 자취집에서 형이 빌려다 놓은 문학책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고전문학은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소설 속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런 기분과 정서에 취하면 삶도 문학적인 분위기로 빠져든다. 내 삶에서 문학을 그리워할 만큼 사랑한 적은 없다.


그저 삶에서 우연히 접한 문학이 하나둘씩 쌓여 문학적인 힘을 길러주지 않았을까. 문학은 억지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다가와야 한다.


내가 성장하던 시절에 주변 환경은 문학을 접할 수 있을 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러한 환경에서 문학을 만난 것이 가슴에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고교 시절 하숙집에서 만난 『설국』은 이상향의 나라로 다가왔다. 설국이란 나라가 정말로 세상에 있을 것 같은 상상과 이상향에 빠져 몇 번을 읽었다.


지금이야 그런 소설을 읽으면 그저 그런 내용으로 다가오지만 젊음이 왕성하던 시절에는 현실보다 이상향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된다. 그런 상상이 가져다주는 희열과 설렘 때문에 문학의 매력에 더욱 빠져든 것 같다.


하늘에서 흰 눈이 소담하게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 또 다른 이상향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마음은 가둘 수 없는 곳을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주변 사방이 온통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고향집에서 상상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문학책을 읽은 날에는 꿈속에서도 그대로 소설이 재현되어 나타났다. 문학적인 삶을 그리워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현실과 꿈이 그대로 실현되는 시점이 청춘 시절이다.


지금은 책을 읽어도 소설이 꿈속에서 재현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상상력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제는 이상보다 현실적인 삶의 무게가 눈앞을 가로막아 꿈마저 꿀 수 없는 것이 서글프다.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도 펼치고 호기심을 갖고 무언가를 동경해야 가슴에서 문학이 살아난다.


요즈음처럼 눈이 내리고 날씨라도 추운 날에는 고전 문학이나 읽고 싶다. 추운 날에 고전 문학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가 있지 않을까.


흰 눈이 펄펄 내리는 날에 『설국』을 읽으면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폭설에 오도카니 갇혀 한두 달을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살아가는 것도 흥미로운 삶이 아닐까.


흰 눈에 푹 파묻혀 고요하게 지내는 삶. 문명의 이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삶은 살아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이상야릇한 세상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설국』은 일본의 니가타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아직도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오르는데 소설의 첫 문장만 읽어도 설국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전에는 다른 나라였고,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다.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면 세상은 하얗게 변한다. 하얀 눈이 순백을 상징하듯이 눈이 많이 쌓이면 사람의 마음도 순결해진다. 그런 마음을 담아 『설국』을 쓴 것은 아니었을까.


겨울에 흰 눈이 내리는 날이면 머릿속에는 고향집의 다락방에서 만난 고전문학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던 기억이 오롯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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