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사랑

by 이상역

나팔꽃 피어 행복했던 날

그 꽃에 누워 이슬로 반짝이던 날

그러나 그 여름은 지고

내 사랑도 지고


그 꽃이 좋아 그 여름이 좋아

하늘 오르던 홍화(紅花)의 행복

그 행복 잊자니 눈물이 나도

이젠 모두 사라진 한여름 밤의 꿈인 것을


뜨겁던 숨결의 트럼펫 소리

환영처럼 나를 울리면

아니 올 줄 알면서도 알면서도


그 여름의 행복에 누워 불러봅니다

여름날의 이슬처럼 사라진

나팔꽃 사랑 그대, 그대를(박미리, ‘나팔꽃 사랑’)


나팔꽃은 칠팔월경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 되기 전 하루의 생을 마감한다. 나팔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 허무한 사랑, 덧없는 사랑이다.


나팔꽃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詩人의 마음이 나팔꽃처럼 여리기만 하다. 여름날에 나팔꽃을 바라보며 행복해했던 날이 나팔꽃이 지면서 여름과 함께 사랑도 저버렸다.


그리고 행복한 시간을 잊지 못해 사라진 한여름 밤의 꿈을 목놓아 부르며 그리움을 달랜다.


장지천 천변을 걷는데 자주색 나팔꽃이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팔꽃에 다가가 나팔꽃의 허락을 받지 않고 꽃이 달린 줄기 몇 마디를 꺾었다.


나팔꽃 줄기를 손에 들고 바라보자 여린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나팔꽃은 줄기의 마디에서 잎이 엇갈려 나오고 엇갈린 부분에서 꽃대를 꼿꼿하게 세우고 꽃을 활짝 피웠다. 나팔처럼 생긴 꽃은 꽃받침 다섯 개를 기둥 삼아 꽃잎을 피운 모습이 처연하다.


꽃받침 다섯 개를 바탕으로 꽃잎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꽃잎 밑동은 흰색으로 그 위로 선홍의 자주색 꽃잎이 둘러쌌다. 꽃잎은 오각형 모양의 여린 잎이 감싸 안았고, 꽃 안에는 하얀 꽃밥과 꽃술이 오붓하게 들어앉았다.


나팔꽃 줄기를 빙빙 돌려가며 꽃을 바라보았다. 나팔꽃이 찰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을까.


쨍쨍한 햇빛이 쏟아지는 밝은 대낮도 피하고, 컴컴한 어둠의 터널을 지나 동이 트는 새벽녘에 남몰래 꽃을 피우기 위해 숨을 죽이며 애태웠을 것이다.


내가 괜스레 밤을 지새워 핀 나팔꽃의 수고를 무시하고 꺾었다는 생각이 들자 자책감이 든다.


나팔꽃 줄기는 몇 미터로 자란다. 오늘 천변을 걸어가며 만난 나팔꽃은 어제 보았던 꽃이 아니다. 오늘 만난 꽃은 아침에 새롭게 핀 꽃이다.


나팔꽃은 줄기가 자라면서 엇갈려 잎이 나오고 마디마다 나팔꽃이 꽃대를 세워 하루에 서너 개씩 꽃을 피운다. 나팔꽃 줄기가 쑥쑥 자라며 새롭게 꽃을 피우니 천변에서 만난 꽃을 어제의 꽃으로 착각하게 된다.


나팔꽃은 반나절만 살고 생을 마감한다. 반나절도 내가 꽃을 보기 위해 생명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나팔꽃은 사랑의 명사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특히 오래 이어가지 못한 사랑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하룻밤의 사랑, 풋내기 사랑, 허무한 사랑, 덧없는 사랑으로. 나팔꽃은 들녘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어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끌어다가 인용해서 어쩔 수 없이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천변을 걸어가면 곳곳에서 자주색 나팔꽃을 만난다. 나팔꽃이 천변의 여기저기서 개념 없이 피었다고 해서 흔한 사랑으로 비유해서 사용하면 결례다.


가수 임주리가 부른 ‘립스틱 짙게 바르고’란 노래에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라는 나팔꽃의 속절없는 사랑을 콧노래로 흥얼거려 본다.


노랫말처럼 나팔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지 않는다. 아침보다 이른 새벽녘에 피고 저녁이 오기 전보다 더 일찍 지고 만다. 나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나팔꽃처럼 짧은 사랑을 그리워해 본 적도 없다. 나팔꽃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 아닌 온종일 꽃을 피우는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


오늘은 천변에 핀 나팔꽃을 바라보며 아침의 문을 열었다. 비록 오늘의 시간이 나팔꽃보다 짧게 느껴지더라도 동트는 아침 햇살에 비친 보라색의 짧은 사랑은 잊지를 말아야 한다.


나팔꽃이 세상을 향해 사랑의 기상나팔을 울릴 수 있도록 보듬어 안아 주는 것은 나팔꽃이 아닌 사람의 일이다. 나팔꽃처럼 사랑이 짧다고 해서 애달파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짧더라도 정을 주고 가녀린 마음으로 보듬어 안아주면서 오랜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아침에 나팔꽃이 꽃잎을 활짝 열고 사랑을 피웠듯이 오늘도 마음의 문을 새롭게 열고 삶을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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