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니 얄팍해졌다. 달력이 얇아진 것은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곳에서 근무한 지도 그럭저럭 일 년이 되어간다.
지난해 인사발령을 받은 것이 엊그제인데 마음은 몇 년을 근무한 것 같다. 그렇다고 지난 일 년을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 것도 아닌데 마치 몇 년을 근무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직장에 대한 미련과 애정이 많아서가 아닐까.
사람들은 처음 만난 날이나 자신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여 이벤트를 가진다. 나도 이곳에 근무한 일주기를 기념하여 거창하게 행사나 가져볼까. 마음만 앞설 뿐이다.
그간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한 것일까. 이곳에서 근무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인연의 결과다. 사실 세종에서 근무할 때 홀로 지내는 것이 적적했다. 나이가 더해갈수록 직장을 정년까지 다녀야 하나 하는 것에 의문만 가득했다.
그러다 인연의 연결고리로 인사가 나면서 이곳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이 근무하기에 썩 좋다거나 아니면 마음에 쏙 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기관이나 기관 고유의 특성은 있게 마련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는 얼굴이 많아 근무하기가 편하다는 점이다. 세종에서는 아는 얼굴보다 새로운 얼굴이 등장할 때마다 친근감과 소속감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친밀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이곳에 근무한 일주기를 기념 삼아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다. 아마도 다른 곳에 근무했다면 업무로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내 삶의 보금자리는 서울이고 사무실은 수원이다. 처음에는 전철을 타고 다니다가 여름부터 자가용을 이용해서 출퇴근한다. 세종은 업무가 눈에 띄게 돌아가는데 이곳은 정체된 듯 정체되지 않은 듯 서서히 진행되는 형태로 돌아간다.
사무실은 광교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근무 여건이 좋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한 시간 정도 광교산 여우 길을 따라 산책하고 내려온다.
지난해부터 여름까지는 전철역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서 오고 갔다. 그러다 여름부터 자가용을 이용해서 출퇴근하고 있는데 아침 일찍 출근해서 운동 삼아 걷기를 하고 있다.
아침에 걷기를 시작한 것도 몇 년이 되어간다. 내가 걷기를 시작한 것은 국민안전처 파견을 나갔다가 국토부로 복귀하고 세종 호수공원 옆에서 원룸 생활을 하면서다.
아침에 호수공원 한 바퀴 도는 것을 계기로 걷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최근에 딸의 결혼 준비로 마음이 바빠지면서 걷기를 하지 못했다. 딸이 결혼한 지도 근 한 달이 되어간다.
이제는 딸의 결혼과 관련한 일에서 벗어났다. 딸의 결혼식이 끝나자 어수선하고 바쁜 일도 사라져서 아침에 출근해서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그간 아침에 걷기를 하지 않아 체중이 불어난 것인지 계단이나 언덕을 오를 때면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체중이 불어나면 몸의 어딘가에서 그에 대한 징후가 반드시 나타난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는 담당 업무도 일 년 정도하고 나면 다른 업무를 맡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공직의 특징이다.
공직의 일도 다른 과로 인사가 날 때까지는 대부분 같은 업무를 해야 한다. 동일한 업무를 계속하면 업무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지고 싫증도 난다.
한 과에서 일 년이나 이년 단위로 업무를 돌아가며 해도 무난한데 한번 업무가 맡겨지면 다른 과로 발령이 날 때까지 바꾸지 않는 것이 공직사회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윗사람의 불신 풍조도 한몫한다.
지난 일 년은 마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처럼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했느냐고 따진다면 딱히 내세울 것은 없다. 그냥 시간을 돌아볼새 없이 바쁘게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로 일주기를 기념해서 스스로 위로해주고 싶다. 그간 수고했고 몸 고생이 많았다고. 그중에 가장 큰 일은 딸을 결혼시킨 것이다.
집안의 행사도 무사히 마쳤고, 사무실은 공공측량 성과심사를 전담하는 신설 법인을 허가해 주고 설립을 했다. 공직에 근무하는 동안 법인 설립 업무를 많이 처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토부 국토정보정책과에서는 공간정보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공간정보 총괄사업단을 국토연구원에 설치하고, 자동차운영과에서는 사업용 차량의 민원과 공제 분쟁을 전담하는 자동차 공제 민원센터를 교통안전공단에 설치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공공측량 성과심사를 전담하는 공간정보 품질관리원을 공간정보산업협회에서 분리해서 별도 법인으로 설립했다.
법인설립을 전담하는 전문가도 아닌데 인사발령을 받고 해당 과에 가면 늘 법인설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법인설립을 허가하지 못했다면 성과심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마무리해서 다행이다. 법인설립은 설립의 주체가 있는데 그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설립 속도가 달라진다.
공간정보 품질관리원의 설립 주체는 민간기관인 공간정보산업협회이고, 공공측량 성과심사 업무 위탁자는 지리원이다. 지금까지 법인설립에 필요한 조건은 모두 충족되었고 앞으로 운영만 잘하면 된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니 이곳에 와서 법인설립만 다루면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가정에선 딸의 결혼과 관련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법인설립과 딸의 결혼식을 위해 한해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두 가지 일을 모두 무사히 마쳤고, 이제는 퇴직 후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일주기를 기념해서 글을 쓰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다.
직장을 퇴직하면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지 고민인데 직장과 가정에서 큰일을 겪으면서 깊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는 지난 일 년처럼 바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내년 연말이면 정든 직장을 떠나야 한다. 가정에도 내년에는 딱히 큰 행사가 될만한 것이 없다. 오늘 이후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퇴직 후에 해야 할 것과 나를 천천히 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