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by 이상역

계절의 지휘자인 태풍이 무더위까지 한꺼번에 휩쓸고 지나갔다. 그간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사람의 몸을 뜨겁게 달구더니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은 바람이 싣고 오는 것 같다. 하늘을 향해 선 나뭇가지 사이로 비슬거리는 가을바람이 이파리를 흔들면서 미미하게 움직인다. 나무도 여름의 뜨거운 땡볕에 지쳤는지 나뭇잎이 변신을 서두른다.


오늘은 여름의 더위를 피해 장롱에 고이 두었던 양복을 꺼내 몸에 걸쳤다. 세탁한 양복을 몸에 걸치면 은은한 힘이 솟아난다. 더불어 가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채움의 든든함이 배어난다.


새 옷이나 세탁한 옷을 입고 밖을 나서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 한구석엔 미미한 희열이 일어난다. 그런 희열에 내가 입은 옷을 밖에 드러내고 싶은 옅은 욕심도 생겨난다.


남자는 양복을 몸에 걸치면 자연스럽게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존재의 힘이 타인에게 행동의 자제와 조심성을 갖게 한다. 다른 옷보다 양복은 자신의 소소한 단점을 가릴 수가 있어 좋다.


나는 양복을 입는 것이 편하고 좋다. 그 이유는 옷에 대한 색깔과 계절마다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아서다. 양복을 걸친 몸의 산뜻한 기분처럼 들녘에서 가을바람이 불어와 계절의 파고를 끌어올린다.

내가 몸담은 조직이 겉옷을 새롭게 갈아입었다. 새 옷을 입은 축하의 의미로 동료들과 퇴근 후에 식당에서 조촐한 환영식을 했다. 동료들과 酒의 차수를 늘리고 날짜까지 바꿔가며 늦은 밤까지 알코올로 가을의 고독한 진한 향수를 마셨다.


오랜만에 동료들과 가을의 고독한 향수를 피워 올린 곳은 모 씨가 단골로 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카페다. 자신에 대한 진실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제목처럼 그 카페에는 무언가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카페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지 못했고, 건물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네온사인 간판에서 명멸해가는 희미한 존재의식만 엿보았다. 카페 안에는 어둑어둑한 조명만이 존재의 빛을 발했고, 카페의 구석에서는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개념 없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아직 문단이란 동네에 등단하지 않았고 문학을 꿈꾸던 문학도도 아니다. 그런데도 동료들은 나를 가리켜 “작가 선생”이라고 부른다.


북한 사람이 남한 사람을 대할 때 부르는 그런 목소리와 의미로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다. “작가 선생”, “작가 선생”하고 부르는 은근하고 외로운 목소리가 나의 존재를 슬금슬금 흔들며 나를 위협해 왔다.


나는 성이 이가다. 그런데 작이란 글자를 붙여 작가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 선생’이나 ‘작가 선생’이나 별반 차이는 없다. 북한 사람이 경계 밖 사람을 향해 부르는 호칭이 ‘선생’이다.


나는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카페에 온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자아를 잃어버리기 위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천이라는 동네는 그리 넓지 않은 곳이다. 술집이나 단골로 삼을만한 카페도 별로 없다.


퇴근길에 시내 음식점 몇 군데만 돌아다니면 사무실에서 만났던 얼굴을 다시 보는 곳이다. 그런 좁디좁은 동네에 동료가 단골로 찾아가는 터가 있었다니 내게는 신선한 의미로 다가왔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광풍이 계절을 이리저리 휘몰아간다. 여름내 잠자던 양복을 모처럼 꺼내어 입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사정을 두지 않은 광풍이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깃을 제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강하게 제지한다.


여름의 광풍이 아무리 불어와도 내일이면 다시 새로운 계절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오늘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진실한 의미를 찾아 자신의 숲을 향해 떠났듯이 나도 프루스트처럼 존재의 의미는 아니더라도 진실된 나를 찾아 떠나는 꿈이나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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