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역에서 내려 사무실을 향해 가는데 주변 사위가 갑자기 어두워진다. 이어서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거센 바람이 세상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거친 바람에 땅에 둥지를 틀고 선 나무가 좌우로 흔들리며 시계추처럼 춤을 춘다. 나무가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자라도록 생존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에 휘둘려 쓰러질 듯한 나무가 묵묵히 버티며 잘도 참아낸다. 바람과 나무, 나무와 바람 그 사이에는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하다. 여름의 초입에 세상을 무너트릴 듯한 거친 바람이 들녘에서 불어온다.
바람이 사무실 건물 틈새를 지나가며 휘파람을 불어대고, 주차장에 주차된 차들은 전조등을 번쩍이며 경고음을 울어댄다.
오늘처럼 아침부터 사위가 컴컴해지고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 날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이런 날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죄를 짓지 않았는지, 남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지 하는 의혹과 연민에 휩싸인다.
사무실에 들어와 창밖에 불어대는 바람이 두렵고 불안해서 창문을 잠그고 창밖을 응시하는 중이다. 해가 서산으로 이울려면 아직 멀었는데 주변의 사위가 어둑어둑하다.
얼마 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창문에 와서 콩을 볶듯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힐 때마다 누군가가 나의 등을 마구 두드려 대는 것만 같다.
건물의 유리창을 난타처럼 두드려대는 빗물 소리. 그 빗물이 바람에 휘감겨 대지를 이리저리 휘젓는다. 바람과 빗물이 세찬 물결을 이루며 바다의 파도처럼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훨훨 날아다닌다.
오늘은 한 주를 마감하는 일요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휴일에 사무실을 찾아오면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지난주에 아쉬웠던 것은 무엇이고 내주에 챙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게 된다.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손가락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컴퓨터 자판기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감정을 하나둘씩 빈 여백에 채워 넣는다.
이렇게 자판기를 두드리는 것은 누군가를 위한 일은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들어찬 생각을 밖으로 표출해서 삶을 빗방울처럼 노래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요란하던 바람도 잦아들고 빗물도 뚜렷이 줄어들었다. 주변 사위도 차츰차츰 밝아지더니 서쪽 하늘에는 햇빛이 빛나고 사무실 옆에 선 나무도 잠잠해졌다.
하늘이 지구의 죄를 사해준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죄를 짓고 살지 말라는 것인지 바람과 빗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세상을 거칠게 휘젓던 바람과 빗물이 그치자 주변 사위가 서서히 밝아진다.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빛을 내리쬐면 좋으련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늘의 문을 여는 것은 우주 섭리의 일이다. 하늘은 속이 불편한 것인지 우르릉거린다.
사람도 속이 불편하면 냇물이 흐르듯 꾸르륵거린다. 하늘은 불빛까지 번쩍이며 이리저리 뒤척여댄다. 하늘이나 사람이나 속이 불편한 것을 표현하는 것은 같다. 단지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만 다르다.
하늘은 뱃속이 불편하면 빗물을 토해내거나 세상을 삼킬 듯한 소리로 천둥을 쳐댄다. 하지만 사람은 가벼운 산책을 하면서 속을 다스리면 불편함이 가라앉는다.
하늘은 거칠게 속을 다스리고 사람은 조용하게 속을 다스린다. 사무실 유리창에 송알송알 맺힌 빗방울에는 거친 기운은 사라지고 영롱한 빛이 가득 들어있다.
빗물이 이곳까지 내려오기가 힘이 들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지구에 알리고 싶어 빛으로 보답하는 것 같다. 앞으로 여름날이 걱정이다. 이런 불편한 날이 자주자주 일어날 것만 같아서다.
태양이 뜨거운 것은 참을 수가 있지만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불편한 속을 토해내는 것은 두렵고 무섭다. 빗물이 대지를 적시고 나자 대지의 뜨거운 기운이 모락모락 안개꽃을 피우며 산허리를 감싼다.
그로 인해 바깥의 풍경이 몽환적으로 변해간다. 언제 바람이 불고 비가 왔는지도 모르게 안개가 계곡과 건물과 냇가를 따라 에워싼다. 사람이 연출하는 것은 따라 할 수 있지만, 자연이 연출하는 것은 따라 할 수 없다.
어둑했던 사위가 사라지고 안개가 들어서자 마음이 몽롱해진다. 거친 비바람이 불어올 때는 무섭고 피하고만 싶었는데 안개가 자욱해지자 안갯속을 거닐어 보고 싶은 생각이 인다.
그런 변해가는 모습에 머릿속도 안개처럼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안개비가 내리는 날에 오솔길을 함께 걷고 싶다던 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걸으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고, 끝없는 미로 속에 빠져드는 영원의 세계처럼 다가온다.
안갯속은 걸어갈수록 모든 것이 새롭고, 만나는 것 모두가 낯설게만 다가온다. 오늘은 정말로 기이한 날이다. 거친 바람과 빗줄기가 난무하더니 이제는 안개가 숲과 건물을 모두 덮어버렸다.
하루라는 시간에 세상이 휘휘 변해가는 것을 본 날이다. 비가 거침없이 몰아칠 것이란 두려움은 사라지고 안개를 따라 거리를 서성이며 배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창가에 앉아 빗물이 아닌 조용한 음악이나 들으며 시간이나 태우고 싶다. 밀레의 만종처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교회당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의 화려한 성찬을 누려보고 싶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다시 삶의 전선에 나서야 한다. 사람은 내일이란 희망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참고 인내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순간순간을 누리며 내일이란 명사를 기다린다.
오늘은 다른 것 모두 접고 안개가 가득한 창밖이나 바라보며 옛 시절의 팝송이나 듣고 싶다. 더불어 가버린 시절의 꿈이나 꾸면서 구성진 노랫가락이나 가슴에서 꺼내어 목청껏 불러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