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위한 고백
보호막이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추운 새벽 6시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쓴다.
버스에 몸을 실어 한 시간 동안 꾸벅꾸벅 졸며 사물놀이 한판을 하고 나면 청량리 지하철역이다.
내려가는 지하 계단부터 쾌쾌한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온다.
치이익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가득 찬 찻간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오징어처럼 쾌쾌한 냄새와 함께 납작한 몸이 되어 이리저리 사람물결 따라 움직이다 보면 어느덧 구로공단 앞에 도착이다.
대학교 입학하고 첫 아르바이트.
큰고모가 지인이 우체국장이시라며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냐는 말에 냉큼 오케이를 했다.
편한 우체국 아르바이트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꼬박 한 달을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꼼짝 않고 앉아서 크리스마스실을 포장하는 단순작업을 했다.
마지막 날 받은 급여 봉투 안에는 67만 원의 소중한 내 땀방울이 들어있었다.
스무 살 그때,
집에서 2시간 거리를 출퇴근하던 한 달 동안 이른 새벽 바삐 돌아가는 인파를 보며 인생이란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후 학교도, 직장도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아 점점 새벽 지하철 풍경은 잊혀갔다.
아침부터 삼합 같은 날이다.
왜 그런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마음들이 뒤섞여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아무리 삼합 같은 날이라도 10년 넘은 부부답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건강검진을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나섰다.
아침 7시,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5월 새벽 찬공기에 한번 놀라고 지하철에 한 줄로 줄지어 서있는 인파에 잊고 있던 스무 살 새벽풍경이 떠올라 또 한 번 놀랐다.
마음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치이익
지하철 도착과 함께 기억 속에 숨어있던 콩나물시루 찻간이 내 눈앞에 다가왔다.
우선 익숙한 척 몸을 밀어 넣어보았다.
마스크 덕분인가? 그다지 쾌쾌한 냄새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사람물결 파도는 여전하다.
그때 갑자기 내 몸을 둘러싼 신랑의 팔.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 틈에 나무처럼 곧게 서있는 나.
마치 보호막처럼 어떠한 침입으로부터도 막아낼 것처럼 두 팔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거려도 곧은 나무처럼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자리에 나무처럼 곧게 서있게 하기 위해 복부에 힘을 잔뜩 주고 있을 그 사람의 꿀렁꿀렁한 배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렇게 삼합 같던 기분은 휘리릭 날아가 버렸다.
누가 '갈대 같은 마음' 아니라고 할까 봐!
이제 곧 결혼 14주년이다.
짝꿍이 되어 서로를 알게 된 지는 20년이 넘었다.
모르고 산 날보다 함께 한 날이 훨씬 많아졌다.
내가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나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너무나 익숙해서 고마움을 전하지 못할 때도 많아졌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마음일지 알기에 말하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알아도 모르는 거다.
그래서 고마우면 고맙다고
내 마음은 이렇다고 재잘재잘 이야기해야 한다.
말처럼 쉬우면 누가 못하리.
맘처럼 쉽지 않은 게 문제일 뿐.
그래서 이렇게 글로 적어본다.
내 짝꿍이 되어 주어서 고맙다고
내보호막이 되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덕분에 어디 가서나 당당하게 '나 든든한 보호막 좀 있소'하고 까불고 다닌다고 고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