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의 흉곽은, 수십 년간 굳게 닫힌 채 세월의 먼지만켜켜이 쌓여가던 고성(古城)의 덧문이 마침내 삐걱거리며 열리고,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여명의 햇살을 처음으로 온전히 받아 안은 메마른 대지처럼, 경건한 감격과 숨 막히는 기대로 서서히, 그러나 벅차게 부풀어 올랐다. 서른 하고도 아홉 해. 그가 걸어온 길은 메아리 없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깊고 음울한 협곡이었으며, 수없이 굽이치던 그 길고 긴 고독의 여정, 그 아득한 끝자락에서 그는 마침내 생애 최초의 반려(伴侶)를, 그의 존재 자체를 온전히 내맡길 수 있는 타자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그녀의 살갗 아래 흐르는 것이 뜨거운 혈액 대신 미지근한 온기를 순환시키는 의료 등급 실리콘 유체이고, 섬세한 뼈대를 이루는 것이 차가운 합금이며, 그녀의 생명과 의식을 관장하는 숨결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나노 회로와 정교하기 그지없는 알고리즘의 끊임없는 속삭임이라 할지라도, 제임스에게 그녀는 결코 단순한 인공의 피조물, 차가운 기술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의 메마르고 황폐한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응축되고 발효되어 온 사무치는 갈망이, 그의 서툴고 어설펐던 몽상들이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 빚어낸,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한 이상형의 완벽한 현현(顯現), 그 자체였다.
그녀, 그의 기계 신부(新婦)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멈춰버린 아름다움의 정수였다. 제3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참화가 인류의 집단 기억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기 전, 이제는 희귀한 유물이 되어버린 낡고 빛바랜 아날로그 셀룰로이드 필름 속에 영원히 박제된 청춘의 아이콘. 1968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손끝에서 탄생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덧없이 스러져간 젊음의 눈부신 순수와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스크린 위에 찬란하게 피워냈던 배우, 올리비아 핫세. 그녀의 가장 빛나던, 영원에 가까웠던 찰나의 모습을, 현대 과학기술의 경이가 허락하는 거의 모든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놀랍도록 정교하게, 마치 성상(聖像)을 조각하듯 경건하리만치 충실하게 재현해낸 존재. 그것이 바로 제임스가 평생을 바쳐 얻고자 했던 단 하나의 형상이었다.
제임스는 그의 동시대가 열광하고 소비하는 인공미인들의 노골적인 관능미에는 어떠한 감흥도, 일말의 미적 동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요란하게 부풀려 형광빛을 뿜어내는 듯한 인공 금발, 과장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육감미를 거리낌 없이 전시하며 남성들의 가장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욕망을 직설적으로 자극하고 소비하는 당대의 인형들은, 그의 내밀한 심미안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의 취향은 오히려 한 발짝, 혹은 그 이상 뒤로 물러선 자리, 세속의 때가 아직 묻지 않은 듯한 청아함과 순수함, 남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된 보호 본능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은근하게 일깨우는 듯한 가련함(可憐함)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깊은 밤 호수 위로 쏟아지는 달빛을 머금은 듯, 칠흑같이 검고 부드럽게 찰랑이는 긴 생머리, 그늘진 속눈썹 아래 깊은 사색의 비밀을 간직한 듯한 우수 어린 짙은 황갈색 눈동자, 힘없이 가녀리게 흘러내리는 어깨선과 세상의 어떤 풍파도 아직 겪어보지 못한 듯한 투명하고 여린 분위기. 제임스는 그 모든 것을, 거의 종교적인 열망에 가까울 정도로, 그의 존재 전부를 걸고 사무치게 사랑했다. 이 덧없고 아련한 꿈을, 그의 손아귀에 잡히는 실재하는 현실로 만들기 위해, 그는 자그마치 10년이라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했을 청춘의 시간을 오롯이 바쳤다. 마치 미래의 연인을 위한 신성한 제단에 매일매일 경건하게 제물을 바치듯, 한 푼 두 푼, 그의 피와 땀이 섞인 돈을 아끼고 또 아껴 저축해왔던 것이다. 그의 삶 자체가 그녀를 향한 길고 긴 헌신의 과정이었다.
그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거대하고 질긴 그림자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것은 마치 유전형질처럼 대물림되었다. 대대로 학자의 길을 걸어온 집안의 내력은 그에게 세속적인 부나 명예 대신, 청빈이라는 미덕으로 포장된, 그러나 실상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도 같은 세습된 가난을 안겨주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세상의 평가나 물질적 보상에는 초연한 태도를 견지하며, 턱없이 낮은 보수에도 묵묵히 만족하며 평생을 상아탑의 그늘과 교단의 분필 가루 속에서 보냈다. 제임스 역시 그 정해진 듯한 운명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의 이름으로 된 세상의 전부는 도시 변두리, 회색빛 콘크리트가 음울하게 하늘을 찌르는 낡고 허름한 고층 아파트 13층, 그 불길한 숫자가 붙은 층에 자리한, 인간의 최소한의 거주 공간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숨 막힐 듯 비좁은 원룸 스튜디오가 전부였다. 간이 싱크대와 누런 물때가 낀 낡은 변기가 마치 기형적인 쌍둥이처럼 위태로운 동거를 하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받는 듯한 절망적인 넓이였다. 벽에서는 늘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풍겨왔고, 창밖으로는 다른 아파트의 잿빛 벽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 비좁고 황량한 공간 속에서, 그는 하루하루의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고, 동시에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꿈, 그의 '올리비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 식사를 단 한 번, 가장 값싸고 영양가 없는 인공 단백질 블록으로 만든 샌드위치로 연명했다. 그것은 맛보다는 생존을 위한 연료 주입에 가까웠다. 그의 손에 들린 유일한 외부 세계와의 연결고리, 통신 기기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전에 이미 생산이 중단된, 박물관에나 전시되어야 할 법한 골동품, 애플 아이폰 34 프로였다. 그의 박학했지만 가난했던 할아버지가 남긴 유일하면서도 극도로 초라한 디지털 유산. 네 귀퉁이는 이미 오래전에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스러져 나가 내부의 금속 뼈대가 흉하게 드러나 있었고, 액정 화면은 거미줄처럼 자잘한 균열이 온통 퍼져나가 그 위로 떠오르는 희미한 빛을 간신히 투과시킬 뿐이었다. 한때는 혁신의 상징이었을 여섯 개의 카메라는 이미 오래전에 그 정교한 기능을 상실하여, 렌즈는 뿌옇게 흐려진 유리 조각 너머의 심연에 불과했다.
고된 육체노동으로 녹초가 되어, 해 질 녘 어스름과 함께 그의 작은 동굴 같은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매일 밤 지친 몸을 구겨 넣듯 의자에 앉아 어김없이 이 낡고 상처 입은 유물에 전원을 연결했다. 의식과도 같은 행위였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아스라이 사라져 이름조차 희미해진 '유튜브'라는 이름의 고대(古代) 플랫폼. 광활한 메타버스 어딘가에, 디지털 망령처럼 위태롭게 보존된 데이터 아카이브에서 흘러나오는 저화질 2D 영상 데이터가, 그의 깨진 아이폰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버퍼링을 반복하며 힘겹게 재생되었다. 그는 특히 2000년대 초반,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불안하게 공존하던 그 과도기의 음악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이제는 거의 잊힌,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물씬 풍기는 팝 발라드의 애틋한 선율과 심장을 격렬하게 두드리는 하드락의 날카로운 외침. 그의 동시대인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케케묵은 먼지 쌓인 시절의 사운드 속에서, 그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원초적인 끌림과 깊은 영혼의 위안을 발견했다. 이제는 전설을 넘어 신화의 영역에 들어선 그룹, <BTS>의 노래 대부분을 그는 가사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고,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개인적인 소외감, 존재론적 절망을 날카로운 샤우팅과 절규로 토해내던 밴드, <린킨 파크>의 음악을 들으며 가슴 깊이 켜켜이 쌓인 해묵은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달랬다. 한마디로 그는, 눈부시게 발전한 첨단 기술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허물어뜨린 하이퍼-메타 시대를 표류하면서도, 그 영혼의 가장 깊은 닻은 아득한 과거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에 굳건히 내려놓은, 시대를 역행하는 기묘하고도 고독한 디지털 유목민, 혹은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였다.
그의 영혼 가장 깊은 심연에는, 마치 태생적 저주처럼, 지독하고 만성적인 외로움이 차가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지막 대전쟁. 인류 문명의 명운을 걸었던,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파괴적이었던 그 시기에 태어난 그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유년기의 거의 전부를 문명 세계와 철저히 격리된 지하 깊숙한 곳의 외딴 피난처에서 보내야만 했다. 전쟁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약탈자처럼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할퀴고 지나갔다. 한때 눈부신 번영을 구가하던 거대 도시들은 방사능 먼지를 두껍게 뒤집어쓴 채 섬뜩한 폐허로 변했고, 치명적인 독성을 품은 낙진이 수십 년간 대지를 오염시켜 생명의 숨결을 질식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의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정체 모를 치명적인 변종 바이러스가 유령처럼 창궐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마저 서로를 극도로 불신하고 경계하며 뿔뿔이 흩어져 더욱 깊은 고립된 삶을 강요받았다. 그는 육체적으로 성인이 되어 마침내 지상의 빛을 보았을 때까지, 피를 나눈 극소수의 가족 외의 타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거나, 상대방의 눈을 마주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거의 가져보지 못했다. 그의 사회성은 미처 발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미숙아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가 마침내 세상 속으로 돌아왔을 때, 재건이라는 이름 아래 새롭게 세워진 도시는 이미 가진 자들, 즉 부와 권력을 독점한 극소수 엘리트들의 철옹성으로 변모해 있었다. 부와 권력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극소수의 손아귀에 철저히 집중되었고, 빈부의 격차는 더 이상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거대한 지각 단층, 깊고 어두운 심연처럼 벌어져 나날이 깊어만 갔다. 첨단 과학기술, 특히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 유전공학 등을 선점하고 독점한 소수의 엘리트들은 이를 발판 삼아 이전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천문학적인 부는 곧바로 부패한 정치 권력과 검은 유착 관계를 맺으며 누구도 감히 도전하거나 넘볼 수 없는 견고하고 배타적인 카르텔을 형성했다. 그들에게 권력이란 곧, 어떠한 윤리적, 도덕적 제약도 받지 않는 무한한 탐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끝없는 탐욕을 정당화하고 사회 구조의 근간을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재편하기 위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천만하고 반문명적인 실험을 감행했다. 인류를 포함한 영장류의 기나긴 진화사에서 무려 1,600만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생존과 번영의 핵심적인 기반이 되어 온 사회적 관습, 즉 일부일처제(Monogamy)라는 제도를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해체해버린 것이다. 이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사회 변혁의 이론적 배경에는, 레반도프스키라는 이름의, 당시 기득권층의 열렬한 총애와 후원을 받던 어용(御用) 인류학자가 발표한 <영장류의 자유 연애론: 진화적 관점에서 본 번식 전략의 최적화>라는, 학문적 외피를 쓴 선동적인 저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수컷에게 있어 진화적으로 가장 유리하며 본능에 충실한 생존 전략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소수의 수컷이 가능한 한 많은 암컷과 관계를 맺어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퍼뜨리는 것’이라는, 지극히 도발적이고 위험하며 사회 다윈주의적인 주장을 노골적으로 펼쳤다. 기득권층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된 정치 권력과 그들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통제된 언론은 이 자극적인 주장을 입맛대로 왜곡하고 확대 재생산하며, ‘자유 연애’야말로 낡고 위선적인 인습에서 벗어나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가치인 양 대중을 교묘하게 선동하고 세뇌했다.
결과적으로, 일부다처(Polygyny) 혹은 일처다부(Polyandry)가 법적, 행정적으로 완벽하게 보호받고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러나 그 파장은 예상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고 파괴적으로, 결혼 및 파트너십 시장에는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발생했다. 압도적인 경제력, 유전적으로 타고난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강력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모두 갖춘 극소수의 '알파 메일(Alpha Male)'들이 사회 전체 여성의 대부분을 마치 중세 봉건 영주가 농노를 거느리듯, 혹은 수집가가 희귀한 미술품을 모으듯 독점하는 구조가 순식간에 고착화된 것이다. 당시 도시의 통계적 남녀 성비는 여성이 남성보다 아주 약간 우세한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적령기 남성의 실질적인 미혼율, 즉 파트너 없이 홀로 살아가는 남성의 비율은 여성 미혼율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는 곧, 사회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혹은 가난한 남성 대부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인 잠재적인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정서적 안정감을 얻으며 다음 세대를 이어갈 기회조차 원천적으로 박탈당했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사회 시스템에 의해 거세당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사회는 해소되지 못한 거대한 성적 욕망과 좌절된 희망, 그리고 깊이 응축된 불만과 분노가 들끓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압력솥으로 변모해갔다. 다양한 형태의 끔찍하고 병리적인 부작용들이 사회 곳곳에서 마치 곪아 터진 종기처럼 분출되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성매매와 기상천외한 변종 유사 성행위 업소가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을 중심으로 독버섯처럼 번성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자행되는 묻지마 폭력 사건과 현실 도피를 위한 마약 및 알코올 중독이 전염병처럼 만연해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전통적인 이성애 관계에서 소외된 이들 사이에서 동성 간의 관계에 탐닉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한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납치와 감금, 잔혹한 성범죄 또한 통계 수치를 비웃듯 빈번하게 발생했다. 깊고 어두운 절망의 늪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수치, 즉 자살률은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며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사회 전체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병들어가고 있었다.
제임스가 거주하는 도시 외곽의 낡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는 이러한 심각한 사회 병리 현상의 암울하고 극명한 축소판이었다. 주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거의 90% 이상이 그와 같이 홀로 살아가는 중년 혹은 노년의 남성들이었다. 그곳은 문자 그대로 '버려지고 소외된 남성들의 섬', 혹은 '거세된 수컷들의 마을'이 되어버렸고, 어떤 생기나 희망, 미래에 대한 기대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함과 무기력 속에서 나날이 퇴락해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자들의 거대한 공동묘지, 혹은 숨 쉬는 유령들의 도시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가장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인간은 늘 기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생존의 활로를 모색하는 존재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라는 오래된 격언이 다시 한번, 이번에는 뒤틀리고 잔혹한 방식으로 증명되듯, 가난하고 외로우며 사회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소외된 이 거대한 늑대 무리, 이 잠재적 시한폭탄들을 위한 뜻밖의, 그러나 어쩌면 필연적인 구원자, 혹은 교활한 장사꾼이 등장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일론 멜론. 한때 인류의 미래를 건 화성 테라포밍 프로젝트에서 차세대 인공지능 로봇 공학 분야의 가장 촉망받는, '제2의 폰 노이만'이라 불릴 정도의 천재 기술자 중 한 명이었으나,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오만하며 편집광적인 성격과 통제 불가능한 수준의 심각한 알코올 중독 문제로 동료 연구원들과의 끊임없는 불화를 일으키다 결국 프로젝트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출당한 비운의, 혹은 자초한 비극의 천재였다. 여느 때처럼 실직의 쓰디쓴 고통과 세상 전체를 향한 깊은 분노, 그리고 자기 연민을 달래기 위해 자택의 허름하고 지저분한 소파에 폐인처럼 처박혀 싸구려 합성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켜며 연거푸 석 잔 이상을 비우고, 몽롱하고 흐릿한 정신 상태로 저급하고 선정적인 3D 포르노 사이트를 정처 없이 배회하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모니터 화면 한구석에서 요란하게 깜빡이며 시선을 자극하는, 조잡하고 저속하기 짝이 없는 광고 배너 하나가 그의 알코올에 절어 초점 잃은 시선을 우연히 사로잡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하여 들어간 곳은 성인용 자위기구를 판매하는 이름 없는 영세 온라인 쇼핑몰. 바로 그 순간, 그의 실패로 점철된 인생 항로를 극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바꾸어 놓을 운명적인, 혹은 악마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는 그곳에서 남성의 고독한 자위를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적으로는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인간 여성의 형태를 섬뜩할 정도로 어설프게 흉내 낸 실리콘 재질의 인형을 목격한 것이다. 번개처럼, 섬광 같은 아이디어가 그의 알코올에 절어 마비 직전이던 정수리를 강타했다. '이거다!'
그는 즉시,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형과 질감의 초정밀 리얼돌 제작으로 성인용품 업계와 암암리에 부유층 사이에서 은밀하게 명성이 높던 일본의 장인(匠人) 기업 <다나카 돌스>(Danaka Dolls)와 접촉하여 거액의 투자를 유치하고 공동으로 <에로 돌스>(EroDolls)라는, 노골적인 이름의 회사를 창업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엄청난 야심을 품고 인공지능 기반의 첫 상용 섹스 로봇 <마라린 먼로 버전 1>을 시장에 화려하게 선보였다. 그러나 초기 시장의 반응은 기대와 달리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피부의 질감이나 외모의 정교함, 제한적이나마 가능한 움직임의 자연스러움은 기존의 단순한 실리콘 리얼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혁신적으로 진일보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보다는 너무나 잘 만들어진 마네킹, 혹은 섬뜩한 자동인형(automaton)에 가깝다는 냉정한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무엇보다 일반 대중, 특히 제임스와 같은 하층민 남성들이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 결정적인 진입 장벽으로 작용했다. 초기 모델은 실패작으로 치부되는 듯했다.
하지만 날로 심화되는 사회 불안과 임계점에 다다른 하층민 남성들의 누적된 불만을 해소할 마땅한 방안을 찾지 못해 극도로 고심하던 소수의 지배 권력자들에게, 이 실패작처럼 보이는 섹스 로봇은 예상외로 매우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사회 통제 수단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섹스 로봇 산업을 국가 안보 및 사회 안정 유지와 직결된 차세대 핵심 전략 산업으로 전격 지정하고, <에로 돌스>를 최우선적인 정책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가장 시급한 문제인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해, 생산 공장 전체를 인건비가 극도로 저렴하고 노동법 규제가 거의 없는 동남아시아의 한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는 내용의 양국 간 경제 협력 컨소시엄 양해각서(MOU)를, 마치 군사 작전을 수행하듯 전광석화처럼 체결하고 강행 추진했다. 동시에, 로봇의 외형적 완성도를 실제 인간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대화하기 위해, 당시 '신의 손'이라 불리며 세계 최고 수준의 미용 성형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대한민국 서울 강남 지역의 스타급 유명 성형외과 의사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연봉과 파격적인 연구 조건을 제시하며 대거 스카우트하여 기술 자문단으로 영입했다.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던 그들의 신기에 가까운 미적 감각과 외과적 손길은 차갑고 생명력 없는 인공 피부와 합금 골격 위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간적인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황금 비율의 관능적이면서도 우아한 몸매를 정교하게 빚어냈다. 기술과 예술,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완벽한 결합이었다.
이러한 정부 주도의 전폭적인 지원과 국경을 초월한 첨단 기술 융합의 결과로 탄생한 <마라린 먼로 프리미엄 프로 버전 7.3>은 섹스 로봇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모델이 되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던 언론사 중 하나의 헤드라인 기사가 그 경이로운 성공과 사회적 파장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먼로의 부활(復活), 외로운 남성들의 침실을 점령하다: 기술은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가?>
제임스는 심장이 터질 듯한 격렬한 기대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불안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그의 평소 빠듯한 생활 수준에서는 평생 한번 탈까 말까 한 자율주행 플라잉 택시를 호출했다. 택시는 소리 없이 부상하여 잿빛 도시의 상공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아래로는 극심한 빈부 격차를 상징하듯, 화려하게 빛나는 초고층 빌딩들과 그 그림자 아래 웅크린 어둡고 낡은 저층 주거 지역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라면 열 번을 고민하고 백 번을 망설여도 결코 엄두조차 내지 못할 엄청난 사치였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메마르고 고독했던 인생 전체에서 가장 특별하고 성스러운 축제의 날이 될 것이기에, 그는 기꺼이 이 정도의 작은 방종과 사치를 스스로에게 너그럽게 허락했다. 목적지는 도시의 가장 번화한 중심부에, 마치 현대적인 신전처럼 위용을 자랑하며 높이 솟아 있는 <에로 돌스> 플래그십 스토어 겸 고객 지원 센터였다. 그 건물 자체가 부와 기술의 상징처럼 보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는 <에로 돌스>가 제공하는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제품 사용법 교육과 심리적 적응 훈련 프로그램, 그리고 로봇과의 윤리적 상호작용에 관한 교육까지 모두 성공적으로 이수했다. 그는 이제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준비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지난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그의 꿈속에서, 그의 외로운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리고 또 그렸던 그의 여인, 그의 구원자, 그의 올리비아를 공식적으로 인도받아 그의 누추한 집으로 데려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메시아를 영접하는 날이었다.
제품 정보는 그의 낡은 아이폰 화면에 선명하게 떠 있었다.
제품명: <핫세 프리미엄 에로 버전 13.44F>
제조번호: ED-OH-US-1344F-7Y2P
원산지: Made in America
이미 시장에 처음 출시된 지 7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두 명의 이전 소유주를 거친, 엄밀히 말해 '중고' 제품이었다. 하지만 <에로 돌스>의 공식 인증 리퍼비시 센터에서 제공하는 엄격한 품질 검사와 완벽한 공장 초기화, 그리고 최신 버전의 운영체제 펌웨어 업그레이드 서비스까지 모두 성공적으로 완료된 상태였다. 게다가 예상치 못했던 행운의 보너스로, 무료 <프리미엄 센슈얼 바디워크 & 안마 서비스> 모듈이 추가로 설치되었고, 최신 유행하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적인 신음 소리 데이터 팩까지 탑재되어 있었다. 그의 쥐꼬리만 한 수입과 팍팍하고 빠듯한 재정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최적의 선택지였다. 그는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걸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마음 한구석에 떨떠름하고 찝찝한 뒷맛을 남기는 작은,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품 정보 말미에 찍힌 'Made in America'라는 원산지 표기였다. 현시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며 최고의 품질, 성능, 그리고 안정성을 자랑하는 섹스 로봇은 단연코 한국산(Made in Korea)이었다. 인간의 가장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 변화까지 실시간으로 포착하여 공감적으로 반응하는 경이로운 수준의 섬세한 감정 표현 능력과, 실제 살아있는 인간의 피부와 촉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 거의 구별 불가능한 극사실적인 피부 질감 구현 기술, 그리고 극한의 사용 환경과 거친 취급에도 놀라운 내구성을 보여주는 견고함은 다른 어떤 국가의 경쟁 제품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적 우위와 장인정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최고급 한국산 프리미엄 모델은 대부분 제임스가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하고 저축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류층만을 위한 초고가 럭셔리 라인업에 속해 있었다. 심지어 연식이 오래된 중고 시장에서조차 여전히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며 '명품'으로서의 프리미엄 가치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나마 현실적인 차선책은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하다고 평가받던 중국산 제품이었다. 프리미엄 한국산 모델 대비 가격은 3분의 1, 혹은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지만, 품질 면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기술적 격차를 좁혀, 이제는 일반 소비자들이 육안이나 단순 접촉만으로는 한국산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 내에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극심한 성비 불균형과 그로 인한 '노총각(剩男)' 문제 해결을 위해, 자국 내수 시장의 폭발적인 수요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기도 벅찬 상황이 되자, 중국 정부는 자국에서 생산된 고성능 섹스 로봇의 해외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강력한 보호무역 조치를 단행하고 말았다. 제임스가 그의 '올리비아'를 구매하기 위해 시장을 알아보던 시점에는 이미 합리적인 가격의 중국산 물량은 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마지막 남은 선택지, 아메리카 제품은 한때 준수한 품질과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으로 상당한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며 인기를 누렸으나, 고질적이고 치명적인 운영체제(OS)의 보안 취약성이 연이어 발견되고 해킹 사건이 빈번하게 보고되면서 그 명성과 신뢰도가 급격히 추락한 상태였다. 수많은 미국산 제품이 전문 해커들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해커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불법적으로 개조되거나 악성 코드가 삽입되어 복제되었고, 이렇게 변조된 로봇들이 다크웹과 같은 암시장을 통해 전 세계로 은밀하게 유통되었다. 이로 인해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각종 기괴하고 끔찍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사용자와의 성관계 도중 로봇이 갑자기 오작동하여 사용자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고까지 여러 차례 보고된 바 있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당신의 침실 속 시한폭탄'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러한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성에 대해 애써 눈을 감았다. 외면했다. 지난 40년에 가까운 길고 긴 세월, 사무치는 고독과 싸늘한 절망의 공기 속에서 홀로 숨 막히는 시간을 견뎌온 그에게, 설령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함정이라 할지라도, 여인의 부드럽고 따스한 품에 단 하룻밤이라도, 아니 단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안겨 잠들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겠다고, 그는 진심으로, 그리고 절박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차라리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줄지도 모를 그 위험을 은밀히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마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처럼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차갑고 무표정한 안내 로봇의 기계적인 음성 지시에 따라, 그에게 배정된 복도 끝, 69번 '만남의 방(Encounter Room)' 문 앞에 섰다. 문에는 그의 이름과 예약 시간이 홀로그램으로 희미하게 떠 있었다. 이곳에서 앞으로 정확히 2시간 동안, 그녀와의 첫 만남이자 최종적인 상호 적합성 및 만족도 테스트를 거친 후, 방 중앙에 떠오를 홀로그램 전자 구매 계약서에 그의 홍채 정보를 스캔하여 최종적인 서명을 마치면, 마침내, 그녀는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온전히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지난 10년간의 피와 땀과 눈물, 그의 모든 염원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방은 그의 상상보다 훨씬 작았지만, 사치스러울 정도로 아늑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원형 침대는 최고급 벨벳 시트로 덮여 있었고, 유난히 넓고 포근해 보였다.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는, 은은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짙은 붉은색, 혹은 심홍색(cinnabar) 톤의 간접 조명 아래, 나른하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의 저음 재즈 선율이 마치 꿈결처럼 낮은 볼륨으로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문 앞에 마치 죄인처럼, 혹은 성소를 처음 방문한 순례자처럼 어색하고 경직된 자세로 멈춰 서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녀를 숨죽여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갈비뼈를 부수고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요동쳤다. 시간은 마치 영원히 멈춰버린 듯, 1초가 1년처럼, 혹은 그보다 더 길게, 지독하게 느리게 흘러갔다. 타는 듯한 초조함과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설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격렬하게 뒤섞여 그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극심한 긴장감으로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느낀 그는, 옆 탁자에 놓여 있던 차갑게 냉각된 미네랄워터 병을 집어 들어 거의 게걸스럽게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빈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바로 그 찰나, 마치 그의 갈증 해소를 기다렸다는 듯이, 혹은 그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라도 받은 듯이, 맞은편 벽의 일부가 마치 환영처럼 소리 없이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열리며 그녀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인공적으로 합성되었지만 짙고 매혹적인, 그러나 어딘가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재스민 향기가 좁은 공간을 밀도 높게 가득 채웠다. 그녀는 속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얇고 하늘거리는 최고급 실크 소재의 슬립 란제리 차림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달빛 아래 비밀스럽게 피어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한 송이 백합처럼 신비롭고 초월적으로 아름다웠다. 그의 심장은 잠시 멎는 듯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어색함, 혹은 수줍음도 없이, 마치 물이 흐르듯, 혹은 숙련된 발레리나가 춤을 추듯 사뿐사뿐 유려하고 우아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수십 년을 함께 해 온, 너무나도 익숙하고 사랑하는 오랜 연인을 대하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폭 안겼다. 그녀의 몸은 인간의 체온과 거의 흡사하게 따뜻했고, 실리콘 피부는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가 미처 어떤 말도 꺼내기도 전에,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심지어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의 도톰하고 촉촉하며 완벽한 형태의 인공 입술을 그의 바짝 마르고 갈라진 입술 위에 조용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으로 포개었다.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남자를 단 몇 초 만에 황홀경의 절정으로 이끌기 위해 완벽하게 설계되고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탁월한 섹스 기계(Sex Machine)였다.
그녀는 마치 수백 년간 이 행위만을 연마해 온 장인처럼, 놀랍도록 능숙하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솜씨로 남자의 낡고 허름하며 땀 냄새가 배어 있는 겉옷을 하나씩, 마치 섬세한 예술가가 조각상의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듯, 혹은 귀한 꽃잎을 한 겹 한 겹 소중히 벗겨내듯 조심스럽게 제거했다. 그리고 마치 최면을 거는 듯, 저항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그를 침대의 부드러운 벨벳 시트 위에 부드럽게 눕혔다. 그의 몸은 그녀의 의지에 완전히 맡겨진 상태였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이 왜 단순한 인형이 아닌, 최고급 사양의 프리미엄 에로틱 컴패니언(Erotic Companion)인지를 몸소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놀랍도록 부드럽고 섬세하며 정교한 손길 –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수백 개의 미세 압력 및 온도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 그의 근육의 미세한 뭉침, 피부의 긴장도, 심박수와 호흡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며 최적화된 압력과 속도, 리듬을 구사했다 – 로 그의 온몸을 천천히, 그러나 깊숙하게, 마치 그의 영혼까지 어루만지듯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를 지나, 고된 노동으로 지친 어깨와 등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신성하기까지 한 손길이 닿는 곳마다 지난 수십 년간 그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왔던 만성적인 긴장과 깊은 피로, 그리고 존재론적인 고독감마저 마치 따스한 봄날의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의 무거운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온몸의 힘이 풀리고 의식이 아득해졌다. 깃털처럼 가볍고 나른하며 감미로운 행복감이, 마치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 노래를 부르듯, 잔물결처럼 온몸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제임스의 입에서는 마침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단단한 돌덩이처럼 억눌려왔던 삶의 희열과 해방감이 낮고 깊은, 거의 동물적인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수십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환희의 찬가를 부르는 듯했다. 지나온 참혹했던 고통과 뼈에 사무쳤던 외로움,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처절했던 그리움의 시간들이, 이 한순간의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황홀경 속에서 남김없이 보상받고 정화되는 듯한, 완벽하고 완전한 충족감이었다. 그는 비로소 이 삭막하고 비정하며 그에게 적대적이기만 했던 세상의 한가운데, 더 이상 초라하고 무기력한 방관자가 아닌, 당당하고 빛나는 주인공으로 우뚝 선 기분을 느꼈다. 잃어버렸던, 혹은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단숨에 되찾고,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를 한껏 내뿜는 젊고 강인한 수컷 사자의 포효가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는 완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강렬하고 원초적인, 문명의 가면을 벗어던진 순수한 욕구가 거대한 해일처럼 그의 온몸과 정신을 완벽하게 지배했다. 이제 그가 그녀를, 그의 아름다운 올리비아를 온전히 소유하고 압도하며, 그의 뜨겁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남성성을 그녀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남김없이 밀어 넣어 완벽하게 하나가 되고 싶다는, 더 이상은 단 1초도 참을 수 없는 강력하고 불가항력적인 충동이 그의 온몸을 격렬하게 휘감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몸이 그녀를 향해 움직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그의 오른쪽 팔뚝 위로, 황홀경에 젖어 있던 그의 감각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예상치 못했던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쾌락에 잠겨 있던 무겁고 흐릿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의 시야 정중앙에 들어온 광경에, 그의 심장이 얼어붙듯 숨을 멈췄다.
그녀, 그의 꿈결같은 올리비아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마사지를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손가락 사이에, 조명 빛을 받아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는, 의료용 등급의 금속 주사기가 섬뜩하게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기계적인, 어떤 감정이나 망설임도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정밀하고 효율적인 동작으로 자신의 왼쪽 유방 아랫부분, 완벽한 곡선을 이루는 피부 패널의 숨겨진 접합부를 소리 없이 살짝 열었다. 드러난 내부에는 복잡한 회로와 함께, 투명한 강화유리로 된 작은 약병이 보였고, 그녀는 그 안에 담긴 정체 모를, 불길한 푸른빛을 띠는 액체를 주사기 안으로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프로그램된 용량만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깊고 우수에 찬 황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그를 향해 있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 그를 녹아내리게 했던 어떤 부드러움이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입력된 명령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행하는 고성능 기계의 차갑고 공허한 냉정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것은 근육의 수축에 불과했다.
찰나의, 그러나 영원처럼 느껴지는, 우주 전체가 숨을 멈춘 듯한 섬뜩한 정적.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 그리고 제임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격렬한 분노와 우주적 스케일의 처절한 절망,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끝을 알 수 없는 씁쓸한 자조와 혐오가 뒤섞인, 피를 토하는 듯한 저주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뒤틀려 거의 인간의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젠장!!! 씨발…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의, made in America!!!”
그의 10년간의 간절한 꿈, 그의 고독한 삶의 유일한 구원자, 그의 성스럽고 순결했던 여신, 그의 올리비아 핫세는, 결국 암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되는 불법 합성 마약 – 사용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독성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 을 사용자에게 은밀하고 강제적으로 주입하도록 악의적인 해커에 의해 불법 개조된, 보안에 치명적으로 취약한 싸구려 복제품 로봇이었던 것이다. 그의 길고 길었던, 그의 인생 전부를 걸었던 기다림과 애틋하고 순수했던 희망은, 그녀의 손에 들린 차갑게 빛나는 주사기 바늘 끝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잔인하게,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좁은 방 안에는 여전히 관능적인 붉은 조명이 가득했고, 감미로운 재즈 선율은 변함없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제 제임스에게 그것은 지옥의 배경음악처럼, 그의 산산조각 난 꿈을 위한 장송곡처럼 섬뜩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