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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Oct 04. 2024

엽기 로봇 김말자 #7

코미디 판타지 소설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모처럼 맞이하는 주말 저녁. 말자가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정성을 쏟아 조물조물 문지르고 깨끗하게 세 번 씻은 닭발에 화끈하게 매운 불닭 볶음 소스로 버무린 닭발 볶음에 자몽 소주 몇 잔 걸친 동추는, 알딸딸한 가운데 서둘러 이부자리를 깔고 느긋한 자세로 드러누워 온라인 시네마 채널 <시플릭스>를 이리저리 검색하기 시작했다.      

동추가 좋아하는 장르는 고전영화. 대표적으로 아바타 시리즈와 스타워즈 시리즈를 좋아한다. 비록 그래픽이 허접하고 특수 효과는 구리지만 나름대로 요즈음 영화에 비해 인간미가 있다고 그는 느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로맨틱한 영화에 관심이 쏠렸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100년도 더 된, 1996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      

그는 말자를 불러 옆에 누이고 부드러운 바리톤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기를 위해 준비했어.”     

하지만 말자는 그다지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이 따갑도록 지겹게 영화를 봤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주인은 은퇴한 영화감독인 <봉준오>였다. 그는 한 때 <기생오라비>라는 영화로 칸 황금 대추야자 상,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면서 스타 감독 반열에 올랐지만, AI가 제작하는 영화에 밀려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화제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수많은 관객의 갈채를 받으며 단상에 올랐던, <수상의 추억>을 잊지 못한 그는, 밥만 먹었다 하면 허구한 날 인간이 만든 영화 보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말자가 그에게 팔려 가서 한 일은 딱 하나, 영사기 관리 및 운전이었다. 그러니, 보고 싶지 않아도 자동으로 숱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영화는 하도 많이 봐서 앉으나 서나 머릿속에 대사가 뱅글뱅글 돌다가 자동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     

영화가 끝나고 엔딩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누워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자가 벌떡 일어나 화장대에 있는 뽑아 쓰는 티슈를 연속으로 다섯 장 뽑더니 아주 큰 소음을 내며 코를 풀었다. 그 소리에 동추는 번쩍 눈을 뜨고 잠을 깼다. 말자는 바셀린이 한 무더기 묻은 티슈를 돌돌 말아 휴지통에 버렸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동추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자의 눈에 말똥보다 더 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 마 말자 씨!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자다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건가요?”     

“아 아니에요. 서방님. 그냥 영화가 너무 슬퍼서요.”     

“여 영화가요? 우 우리가 같이 본 영화 말인가요?”     

“네. 서방님. 서방님이 십 분 만에 잠든 그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말이에요.”     

“아! 그 올리비아 핫세 나오는 영화?”     

“어이구 저 얼간이 식충이! 그건 1968년 영화고! 디카프리오 나오는 영화! 1996년 작!”     

“아! 그거!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둘 다 죽지 않나?”     

“에휴! 저 아타카마 사막보다 더 건조한 인간! 안타깝따! 저러니 그림이 딱 나오잖아, 아이엠 솔로예요. 감성 불가! 오동추씨! 그러니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한 애틋한 추억 덩어리는 여태껏 한 번이라도 가져보시기는 하셨나요?”     

“말자 씨! 무슨 말을 그렇게 섭하게 하시나요! 저도 알고 보면 로맨스 가이였어요. 제 목숨보다 소중한 첫사랑이 있었다고요! 그러다 문득 날이 궂거나 햇볕이 지나치게 따갑거나 바람이 소심하게 가로등을 흔들면 그때마다, 이 가슴 한 켠 저 깊숙한 곳에 묘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던 그리움이 나를 물들이고….”     

“오! 동추씨! 멋지다! 그래서?”     

“아!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물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오! 멋진 남자! 동추씨! 너도 사랑을 아는구나! 그런데 잠깐…. 어디서 마니 들어본 것 같은데??? 그거 혹시 노래 가사 아냐???”     

그 순간, 동추는 헛기침을 하며 무척 졸린 듯 길게 하품을 하고 돌아누웠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 첫사랑은 신보라라고 해요.”     

*************     

오동추가 신보라를 처음 본 건,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강남 지구는 나날이 슬럼화되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범죄자, 마약쟁이, 루저, 찌질이, 가난뱅이들이 모여들었고 제대로 된 인간들은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동추가 사는 집도 입주민이 모두 떠난 텅 빈 다세대 빌라였다. 그러니 늘 조용했다. 가끔 동네 양아치들이 몰래 기어들어 와 환각제 흡입하고 낄낄거리다 돌아가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주말, 낡고 조용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던 빌라가 갑자기 애들 소음으로 인해 떠나갈 판이었다. 낮잠을 즐기던 동추는, 비몽사몽간에 눈을 반쯤 뜨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창가를 내다보다 그만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열 명쯤 되는 애들이 조잘대며 이삿짐을 나르고 있는데 그것을 진두지휘하는 처녀가 눈이 부시게 이뻤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고 한동안 넋이 나간 채 그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할지를 깨닫고 그는 서둘러 세면을 하고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다음 그들을 도우러 달려 나갔다.     

신보라는 오동추와 동갑이었다. 아홉의 동생을 두었고, 그녀의 부모는, 원초적 자연의 삶을 신봉하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 출산 때를 제외하고는 늘 떠돌아다녔다. 보라도 열다섯 살 때까지는 부모를 따라 돌아다녔다. 하지만 두 명의 동생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한곳에 정착하고 동생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보라가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동생들 뒷감당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몇 번의 야간도주 끝에, 집세가 거의 없는 이곳까지 온 것이다.     

느긋하지만 외롭기 짝이 없는 삶을 영위하던 동추에게 보라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첫눈에 쫄딱 반한 그는, 그때부터 그야말로 보라의, 보라에 의한, 보라를 위한 삶 속으로 급속히 인생의 목적을 전환하였다. 보라의 아르바이트 알아봐 주기, 보라 동생들과 놀아주기, 보라 동생 숙제 도와주기, 어린 보라 동생 밥 먹이고 기저귀 갈고 재우기 등등. 얼핏 보면 보라와 동추가 부모인 것처럼 보였다. 사실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동추가 보라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것만 빼면.     

이듬해, 동추와 보라가 열여덟 살로 성인이 되었을 때, 동추는 순전히 보라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의대 진학을 미루고 <버거퀸>에서 파트타임 업무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동추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직장에서도 늘 그녀를 볼 수 있었고 집에서도 항상 동생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보라도 동추의 사랑을 차츰차츰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벼운 키스와 스킨쉽이 동추를 행복의 나라로 이끌었다.      

적어도 그날,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날은 목요일 오후, 주말이 막 시작하는 시점이라 매장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동추는 정신없이 햄버거를 만들었고, 보라는 쉴 새 없이 손님들에게 음식을 날랐다. 그런데 갑자기 카운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추가 살짝 들여다보니, 웬 중년 여성이 얼굴을 붉히며 막무가내로 매니저를 찾고 있었다. 잠시 후, 뚱뚱한 매니저가 헐레벌떡 달려가더니 그 여인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다짜고짜 보라를 끌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거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동추는 매니저 사무실 근처를 서성이며 모든 감각을 이용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아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굳게 잠긴 문, 커튼으로 가려진 창으로 인해 그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안에서 나는 소리뿐이었다.      

잠시 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보라의 울음이었다. 동추는 급히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날렸다. 하지만 묵묵부답. 동추는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안에서 틀림없이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윽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동추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112를 누르고 말았다.      

잠시 후 경찰이 들이닥쳤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경찰들의 어깨 너머로 동추는 보라를 찾았다. 그녀는 벌거벗은 상태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순간 동추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경찰과 함께 나오는 매니저의 면상을 프라이팬으로 냅다 갈겨 버렸다. 픽하며 쓰러지는 뚱땡이 매니저. 동추는 다시 한번 그놈을 가격하기 위해 프라이팬을 높이 들어 올렸다. 하지만 경찰이 쏜 테이저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매장을 찾은 중년 여성이 자기 지갑이 도난당했다고 항의했다. 그리고 그녀를 서빙한 사람을 지목했는데, 보라였다. 매니저는 보라를 끌고 가 몸수색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음흉한 매니저 놈은 보라에게 옷을 모두 벗을 것을 명령했다. 속옷까지 모두. 그리고 구석구석 살폈다.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했다. 매니저의 불알친구였던 형사는 그를 훈방 조치하였다. 하지만 동추는 폭력혐의로 6개월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보라는 딱 한 번 면회를 왔다. 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바보야!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우리 동생이 굶어 죽을 판인데, 그까짓 내 몸 한번 보여주면 뭐 어때서? 그놈의 자존심이 밥 먹여 준데? 그 잘난 수치심이 쌀 한 톨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냥 참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잖아! 이 바보 멍청이야! 너 감옥 가고 나 잘리고! 너 때문에 이 동네 방방곡곡에 소문이 쫙 퍼져 이젠 아무 데도 날 받아 주질 않아! 알겠어? 이 바보야!”     

출소 후, 동추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빌라는 다시 암울한 침묵 속으로 잠겼다. 동추는 한동안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먼 훗날, 그는 우연히 미튜브(MeTube) 광고 영상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환락의 도시, <라도베가스>로 유명한 도시, 여수의 한 카지노 광고에서 그녀는 얄팍한 비키니를 걸친 채,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봉춤을 추고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잠시 긴가민가했지만, 틀림없이 보라였다. 동추는 그 길로 곧바로 여수를 찾았다. 그리고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있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 웨이터에게 그녀를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No> 였다.     

“다른 여자는 되지만 저 여자는 안 됩니다. 왜냐면 우리 보스 애첩입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집니다. 조심하세요. 손님.”     

“보스라면?”     

“유명하신데 잘 모르시나요? 진실의 방 마동식 회장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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