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간 거울 속의 거래

시즌 2

by 남킹

서울행 고속버스가 고속도로 휴게소의 불빛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빛은 마치 거대한 수술실의 무영등처럼, 박하진의 초라한 현실을 남김없이 비추고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승객들의 차가운 시선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그녀의 등을 떠밀었고, 운전기사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녀에게 이곳이 여정의 끝임을 선고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소리처럼 둔탁하게 울렸다.

버스가 매연을 뿜으며 떠나가자, 휴게소의 소음 속에서 그녀는 완벽한 섬이 되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사위는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그녀의 주머니 속에는 동전 몇 개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놈의 16만 5천 원….'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간 그 저주 같은 숫자. 이제 그녀는 이름과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완벽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직장 내 갑질녀라는 낙인에 이어, 버스 민폐녀라는 새로운 꼬리표까지. 그녀의 인생은 바닥을 뚫고 더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휴게소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들의 익명성으로 가득했다.

가족 단위의 웃음소리,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 트럭 기사들의 걸쭉한 농담. 그 모든 활기찬 풍경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대로 밤을 샐 수는 없었다.

뻔뻔함을 마지막 무기 삼아, 아무나 붙잡고 서울까지 차를 태워달라고 빌어볼 작정이었다. 구걸이라도 해서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야 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시야에 한 줄기 빛처럼 무언가가 들어왔다. 주차장 구석, 어둠 속에 잠겨 있는 택시 한 대. 그리고 그 택시의 지붕 위에 놓인 등에는,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택시]

그녀는 홀린 듯이 택시로 다가갔다.

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피로와 세상사에 대한 환멸이 그의 얼굴에 깊은 계곡을 파놓은 듯했다.

박하진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차갑게 식은 손으로 창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똑. 똑.

운전석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허승관이었다.

3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인간에 대한 증오를 연료 삼아, 그는 출소하자마자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 넣은 그 여자, 장미연을 찾아내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목표를 위해 전국을 떠돌며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화려하게 꾸몄지만 어딘지 모르게 절박함과 그늘이 엿보이는 얼굴.

허승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는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불신했다.

"무슨 일이오?“

그의 목소리는 잠에서 갓 깨어난 사람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저… 아저씨, 죄송하지만… 서울 가시는 길이시면… 저 좀 태워주실 수 있나요?“

박하진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허승관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값비싼 옷, 완벽한 화장. 하지만 텅 비어버린 눈동자.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또 어떤 속셈을 가진 여자인가.

"돈은 있고?“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돈은… 도착해서 드리면 안 될까요? 제가 지금 지갑을 잃어버려서… 집에 가면 꼭 사례하겠습니다. 제발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녀가 평생을 연마해 온, 남자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기술이었다.

허승관은 잠시 생각했다.

'꽃뱀'. 그의 뇌리에 그 단어가 스쳤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절박함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과거 교도소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자신의 처절한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어차피 서울 쪽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타쇼. 대신, 도착해서 딴소리하면 바로 경찰서로 갈 테니 그렇게 아쇼."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하진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활짝 웃으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택시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방금 올라탄 것이 희망의 방주가 아니라, 또 다른 지옥으로 향하는 카론의 나룻배라는 것을.

택시는 어둠을 가르며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라디오 소리도, 그 어떤 대화도 없었다. 오직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스치는 단조로운 소음만이 그들의 어색한 동행을 채우고 있었다.

박하진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집에 도착하면 어떡하지? 정말 돈이 한 푼도 없는데.’

그녀는 흘깃, 백미러에 비친 허승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무뚝뚝하고 험악해 보이는 인상. 돈 문제로 실랑이를 벌였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방법은 하나뿐인가….’

그녀는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가진 마지막 카드. 그녀가 가장 경멸하면서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해 온 바로 그 무기.

허승관 역시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 뒤에 숨겨진 불안과 계산적인 눈빛.

그는 장미연을 떠올렸다. 그녀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순진한 척, 피해자인 척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던 그 교활한 눈빛. 허승관의 손이 운전대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3년의 세월 동안 삭이고 삭였던 분노가 다시금 위액처럼 들끓어 올랐다.

어느덧 택시는 서울의 경계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거대한 괴물의 눈동자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되오?“

허승관이 처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강남이요. XXX 오피스텔로 가주세요."

택시는 익숙하게 강남의 화려한 거리로 진입했다. 마천루들이 뽐내는 현란한 불빛 아래, 박하진의 오피스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성공과 몰락이 함께 깃든, 그녀의 성이자 감옥.

택시가 멈춰 서고, 정적이 흘렀다. 이제 심판의 시간이었다.

"다 왔소. 요금은 12만 8천 원.“

허승관은 미터기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박하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허승관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가련하고도 유혹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저씨… 제가 정말 죄송한데… 지금 당장은 드릴 돈이 없어요."

"뭐라고?“

허승관의 미간이 좁혀졌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하진은 말을 잠시 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올라가서…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제가… 다른 걸로라도 보답해드리고 싶어서요."

그것은 명백한 제안이었다. 허승관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역시나. 장미연과 똑같은 수법. 그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그녀를 경찰서에 끌고 갈까.

아니면…. 그의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스쳤다.

‘그래.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 증거를 남기면 돼.’

그는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을 더듬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좋소. 올라갑시다. 어떤 보답인지 한번 받아나 봅시다."

박하진의 집은 밖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화려했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사람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기가 흘렀다.

고급 가구들은 주인을 잃은 유령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허승관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박하진은 그의 등 뒤에서 문을 잠갔다.

‘딸깍’하는 소리가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소리처럼 울렸다.

그날 밤, 그곳에서는 차가운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사랑도, 정욕도 아닌,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오래된 증오가 뒤엉킨 행위였다.

허승관은 철두철미하게 움직였다.

그는 그녀의 입에서 “이것은 택시비 대신이며, 내가 원해서 하는 관계”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만들었다. 그의 스마트폰은 그 모든 소리를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두 사람은 침대 양 끝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박하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팔았다는 치욕감보다, 당장 내일부터 닥쳐올 생계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아저씨…."

"왜."

"고마운데…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더 할게요. 저… 20만 원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당장 내일 밥 사 먹을 돈도 없어서 그래요. 돈 생기는 대로 바로 갚을게요. 제발요."

그 순간이었다.

허승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20만 원.

그녀의 그 말이, 3년 전 장미연이 자신에게 던졌던 그 말과 정확히 겹쳐졌다.

“오빠, 나 10만 원만 줘.”

그의 눈에 박하진은 더 이상 박하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장미연이었고, 자신을 기만하고 이용하려 했던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돈? 이 꽃뱀 같은 년이!“

그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요? 꽃뱀? 내가 지금 몸까지 줘가며 택시비를 갚았는데, 이게 무슨 말이에요!"

박하진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웃기지 마! 네년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같은 년들 때문에 내가 3년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어! 근데 또 돈을 달라고? 한 푼도 줄 수 없어!"

허승관은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이봐요! 그냥은 못 가! 내 말 안 들려?"

박하진은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얼굴을 깊게 할퀴었다. 그의 뺨에서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허승관은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를 손으로 훔쳤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에 묻은 붉은 피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안에 갇혀 있던 3년 묵은 분노의 댐이,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짐승 같은 분노만이 이글거렸다. 그는 뒤돌아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박하진의 뺨을 그대로 가격했다.

“악!”

박하진은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허승관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그녀의 위로 올라타, 주먹을 비 오듯 쏟아붓기 시작했다.

“너 같은 것들은… 너 같은 것들은 다 없어져야 해…!”

그의 중얼거림은 울음 같기도 했고, 저주 같기도 했다. 그의 주먹은 박하진의 얼굴을, 몸을 가리지 않고 내리꽂혔다. 한때 그녀의 가장 큰 자랑이었던, 완벽하게 빚어진 그녀의 얼굴이 끔찍하게 뭉개져 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하진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그녀는 부서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허승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온몸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발치에, 한때 박하진이었던 것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순간, 그를 지배했던 광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는 차가운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그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는 복수를 원했지만, 살인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허승관은 겁에 질린 짐승처럼, 자신의 흔적을 지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냅다 그곳을 도망쳤다.

****

텅 빈 오피스텔.

값비싼 가구들과 깨진 거울 조각들 사이로, 싸늘한 새벽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금이 간 거울 속에는, 퉁퉁 부은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죽어 있는 박하진의 마지막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가 평생을 쫓았던 화려한 욕망의 끝은, 이토록 차갑고 고독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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