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한동식.
그의 인생은 두 개의 행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의 행성은 빛 속에 존재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한민국 항공우주 분야의 미래를 짊어진 천재 공학 박사이자, 대전 모 연구소의 존경받는 책임 연구원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복잡한 수식과 설계도가 성서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의 동료들은 그의 명석한 두뇌와 온화한 리더십을 칭송했다.
그는 개천에서 용이 난 신화의 주인공이었고, 흙수저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였다. 이것이 낮의 한동식, 모두가 아는 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해가 지고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하면, 그는 자신만의 또 다른 행성으로 건너갔다.
그곳은 쾌락과 중독이라는 이름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비밀스럽고 어두운 세계였다. 밤의 한동식은 더 이상 존경받는 박사가 아니었다.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굶주린 사냥개였다.
그의 이중생활은 MIT 유학 시절, 한 여자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친구의 꼬임에 빠져 처음 가본 도시 외곽의 허름한 바.
무대 위에서 낡은 조명을 받으며 무표정하게 옷을 벗던 스트립걸, 엘리자베스.
그녀의 텅 빈 눈동자와 끈적한 몸짓 속에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생애 처음으로 날것 그대로의 쾌락을 발견했다.
억눌려 있던 그의 욕망은 그때 비로소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 그는 섹스와 마약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적인 머리는 그가 모든 것을 잃지 않도록 아슬아슬한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그는 박사 학위를 땄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의 삶은 그의 이중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부잣집 외동딸과의 결혼은 그의 바람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3년 만에 파국으로 끝났다.
이혼 당시 받은 거액의 재산 분할금은, 그가 본격적으로 여자 사냥에 나설 수 있는 든든한 실탄이 되어주었다.
그는 여러 결혼정보회사의 VVIP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결혼을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결정사는 질 좋은 사냥감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거대한 카탈로그에 불과했다.
그의 완벽한 스펙은 최고의 미끼였고, 여자들은 그 미끼를 기꺼이 물었다. 결정사 입장에서도 그처럼 ‘상품성’ 좋은 남자가 계속해서 여자를 만나주는 것은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그렇게 그는 수년간 쾌락의 바다를 유영하며, 단 한 번도 발이 젖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에게 하룻밤의 유흥이자,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시켜주는 트로피일 뿐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귀찮고 불필요한 사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날도 결정사를 통해 한 여자를 소개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정희영이었다.
****
정희영.
그녀의 인생은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와 같았다.
그녀의 영혼은 오래전, 친구, 안소영의 배신과 세상의 폭력 앞에 산산조각 났다. 조각난 파편들은 남자에 대한 증오와 세상에 대한 냉소로 날카롭게 벼려졌다.
성 폭행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자 찾아간, 부산 고모 집에서의 시간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고모부의 더러운 손길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순수마저 짓밟았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버텼다. 서울의 대학에 합격하여 그 집을 벗어났을 때,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투사가 되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투쟁의 깃발이 되었다.
그녀는 학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했고, 총장실을 점거하며 싸웠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세상에 온몸으로 돌을 던지는 잔다르크가 되고자 했다.
그 투쟁의 현장에서, 그녀는 운명처럼 안소영과 재회했다.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 안소영.
그녀는 십수 년 만에 마주한 친구 앞에서 차갑게 돌아섰다. 안소영의 미안함 가득한 눈빛은 그녀에게 위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소금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투사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녀의 투쟁 이력은 취업 시장에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었다.
경제적 궁핍은 그녀를 결국 가장 경멸하던 곳으로 이끌었다.
화려한 조명과 술, 남자들의 추잡한 욕망이 뒤엉킨 룸살롱.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도 여왕처럼 군림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과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도도함은 오히려 남자들을 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돈을 벌었고, 비슷한 상처를 가진 장미연을 만나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복수의 마지막 단계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결혼정보회사.
그곳에서 부유하고 힘 있는 남자들을 물어,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고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것. 그것이 그녀가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되갚아 줄 복수의 완성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동식을 만났다.
재산 100억 이상, 천재 박사, 완벽한 남자. 더할 나위 없는 사냥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매력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그를 적극적으로 꼬셨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녀의 얼어붙었던 심장이, 그 남자 앞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동식은 그녀가 만나왔던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그녀의 머릿속을 궁금해했고, 그녀의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를 ‘정희영’이라는 한 사람의 지적인 여성으로 존중해주었다.
“희영 씨의 눈을 보고 있으면, 우주를 보는 것 같아요. 깊고, 신비롭고,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죠. 난 그 우주를 탐험하고 싶어요.”
그의 달콤한 속삭임은 그녀가 수십 년간 쌓아온 방어벽을 허물어뜨리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생애 처음으로 상처받지 않은 여자로서 사랑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와의 잠자리에 탐닉했다. 그것은 더 이상 복수를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 쾌락의 끝에서, 그녀는 한동식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복수라는 목표는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이 피어났다.
그녀는 이 남자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의 아내가 되어, 과거의 모든 상처를 잊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한때는 경멸했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자신이 마시고 있는 것이 사랑의 성배가 아니라, 달콤한 독이 든 잔이라는 것을.
한동식은 이제 슬슬 정희영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명 매력적인 여자였다. 지적이고, 아름답고, 침대 위에서는 그가 만나왔던 어떤 여자보다도 뜨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모든 사냥감이 그렇듯, 일단 정복하고 나면 흥미는 급격히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점점 귀찮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동식 씨, 우리 다음 주말에는 뭐 할까요? 같이 여행 갈래요?”
“동식 씨, 어제는 왜 전화 안 받았어요? 보고 싶었는데.”
“동...식 씨. 사랑해요.”
그녀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한동식은 관계의 끝을 직감했다. 사랑은 그에게 족쇄이자 감옥이었다.
그는 서서히 그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는 횟수가 줄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미뤘다. 그의 스마트폰 속 결혼정보회사 앱에서는 이미 새로운 ‘사냥감’들의 프로필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희영은 그 미묘한 변화를 동물적으로 감지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사라졌고,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간신히 세운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가기 직전이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예민한 걸 거야. 그는 바쁜 사람이니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희영 씨. 웬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동식 씨… 보고 싶어서요. 우리 오늘 저녁에 잠깐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 오늘 좀 곤란한데.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거짓말이었다. 그는 오늘 아무 약속도 없었다.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내일은요? 모레는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애절해졌다.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글쎄… 당분간은 좀 바쁠 것 같은데. 내가 시간 되면 연락할게.”
‘시간 되면 연락할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완곡하고도 잔인한 거절의 말이었다.
전화가 끊기고, 정희영은 차가운 휴대폰을 든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내면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증오라는 이름의 짐승이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그의 오피스텔 앞에서 밤새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녀는 그의 연구소 근처를 배회했다. 마치 길 잃은 유령처럼.
그녀는 스토커가 되었다.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고급 스카이라운지에서, 그의 옆자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박하진이었다.
그들이 만났던 바로 그날, 그 장소에도 정희영은 있었다.
그 순간, 정희영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자신은 그의 수많은 트로피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잔인한 진실이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한꺼번에 그녀를 덮쳤다.
일진 놈들의 더러운 웃음소리, 친구의 외면, 고모부의 추악한 손길. 그리고 지금, 한동식의 배신.
모든 남자는 똑같았다. 그녀를 이용하고, 짓밟고, 버리는 존재.
그녀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날카롭게 잘 닦인 칼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사랑에 빠진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오직 복수심에 불타는, 상처 입은 암살자의 차가운 분노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래.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가는 거야. 복수. 그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마지막 남은 미련과 희망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파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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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식도 차츰 눈치채고 있었다. 정희영이 자신을 스토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차 뒤를 따라오는 익숙한 차량,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집요한 그녀의 눈빛.
박하진을 만나던 그날도 그랬다.
그는 새로운 사냥감인 박하진을 꼬드겨 하룻밤 잠자리로 이끌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희영을 보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동식은 순간 불안감을 느꼈다. 정희영은 그가 지금까지 만나왔던 여자들과는 달랐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단순한 실연의 상처를 넘어선, 어떤 광적인 집착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 관계를 이대로 끝냈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박하진에게 ‘더치페이’라는 무리수를 던져, 일부러 그녀가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은 틀렸다.
그는 정희영이라는 여자가 품고 있는 상처의 깊이와, 그 상처가 만들어낸 증오의 크기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버릴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복수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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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정희영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검은색 옷을 입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그리고 손에는 과도가 든 가방을 들고, 한동식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심장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텅 빈 공허함과,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차가운 사명감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그의 차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늘 밤, 이 지긋지긋한 악연의 고리를,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끊어버릴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