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박하진의 오피스텔은 하나의 정교하게 세공된 무덤 같았다.
강태식 형사는 방 안에 감도는 비릿한 피 냄새와 값비싼 향수 냄새가 뒤섞인 역한 공기 속에서, 바닥에 그어진 분필선 안쪽을 묵묵히 응시했다.
부서진 가구들, 깨진 거울 조각, 그리고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 누워있던 한 여자의 비극적인 종말.
그녀가 평생을 갈망했던 화려함은 이제 그녀를 차갑게 식어가는 시체로 만들기 위한 배경처럼 스산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피해자의 손톱 밑에서 가해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가 다량 검출되었습니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과수 감식팀원의 보고에, 옆에 서 있던 안소영 경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피해자의 뭉개진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그 얼굴은 이제 끔찍한 분노의 흔적만을 담고 있었다.
강태식은 소영의 굳은 표정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은 긴장감 속에서, 그는 5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진실을 외면했던 그녀의 고집, 그리고 법정에서 절규하던 한 남자의 얼굴.
"DNA 대조 결과 나왔습니다."
젊은 김형사가 태블릿 PC를 들고 다급하게 다가왔다.
"용의자는… 허승관. 54세. 폭행 전과 1범. 그리고… 5년 전, 성폭행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얼마 전 만기 출소했습니다."
허승관.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사무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강태식의 시선이 안소영에게로 향했다. 소영은 입술을 깨물며 태블릿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5년 전, 자신이 직접 수갑을 채웠던 그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으로 일그러져 있던 바로 그 얼굴.
"그때… 그 택시 기사로군."
태식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 속에는 희미한 책망의 가시가 숨어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허승관은 출소 후, 다시 택시 운전을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전국에 수배령 내리고, 택시 회사에 연락해서 차량 위치 추적 시작하겠습니다!"
강태식의 지시가 떨어지자, 사무실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영은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모니터 위에 떠 있는 허승관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이 악연을 끝내야 했다.
허승관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낡은 택시는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밤의 도로를 위태롭게 질주했다. 뺨에 난 손톱자국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고, 손에 묻었던 박하진의 피 냄새가 환각처럼 코끝을 맴돌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후회와 공포가 그의 심장을 쥐어짰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박하진의 마지막 얼굴 위로, 장미연의 교활한 미소가 겹쳐졌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여자는 장미연이었고, 세상의 모든 부자는 자신을 짓밟는 존재였다. 그는 이 부조리한 세상의 피해자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이제 오직 하나, 장미연을 찾아 복수하는 것이었다. 죽더라도, 그년을 먼저 지옥으로 보내고 가야 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도망치기에도, 복수를 하기에도 돈이 필요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낡은 휴대폰을 꺼내, 교도소에서 알고 지내던 조폭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허승관."
[어, 승관이 형님? 웬일이슈? 출소했다는 소리는 들었는디.]
"장미연. 그 계집애 찾아야겠다. 어디 있는지 알아봐 다오. 찾아만 주면… 거액을 주겠다."
[거액? 형님 돈이 어딨다고. 또 사고 쳤수?]
"사고? 그래, 쳤다! 그러니 그년만 찾아다오!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테니!"
전화를 끊은 그는 운전대를 부서져라 내리쳤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이제 잃을 것이 없는,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이었다.
****
한동식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그곳은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 차갑고 고요한 콘크리트 동굴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관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정희영은 기둥 뒤, 어둠의 일부가 되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 안에서, 과도는 차가운 분노를 품은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다가왔다. 익숙한 엔진 소리. 한동식의 차였다.
차가 주차 공간에 멈춰 서고, 운전석 문이 열렸다. 한동식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넥타이를 풀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또 다른 여자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을 터였다.
바로 그 순간, 정희영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동식 씨."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동식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그가 알던 아름답고 지적인 정희영이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의 여신, 혹은 지옥에서 돌아온 망령과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희영 씨…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연락한다고 했잖아."
한동식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뒷걸음질 쳤다.
"연락? 누구한테? 어제 그 여자한테?"
희영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재밌었어? 새로운 장난감이랑 노는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희영 씨, 우리 이러지 말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
희영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주차장 안을 서늘하게 울렸다.
"당신이 날 가지고 놀고, 쓰레기처럼 버린 게 오해야? 내 사랑을, 내 진심을 짓밟은 게 오해냐고!"
그녀는 손에 든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과도를 꺼내 들었다. 한동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희영 씨, 진정해! 칼은 왜… 위험하잖아!"
"이제 와서 내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 위선 떨지 마, 이 역겨운 인간아!"
정희영은 비명과 함께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절박했다. 한동식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지만, 칼날은 그의 팔뚝을 깊게 스치고 지나갔다.
"악!"
뜨거운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보고 경악했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비상구 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정희영은 피 묻은 칼을 든 채,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쫓았다.
"거기 서! 한동식! 거기 서라고!"
계단 안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로 가득 찼다. 한동식은 계단을 몇 칸씩 건너뛰며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지상으로 나온 그는 무작정 앞만 보고 내달렸다. 그의 연구소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 쪽이었다.
그는 가시덤불에 옷이 찢기고,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 속을 헤치며 달렸다. 폐가 터질 것 같았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등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정희영의 거친 숨소리는, 죽음의 신이 내쉬는 숨결처럼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는 거의 죽을힘을 다해 산을 넘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켜진 한적한 국도변으로 굴러 떨어지듯 빠져나왔다. 그는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채, 비틀거리며 도로 위에 섰다.
바로 그때, 저 멀리서 한 줄기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였다.
허승관은 정처 없이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야 했고, 돈을 마련해야 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고, 심장은 불안하게 날뛰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피투성이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허승관은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강도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함정? 하지만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게다가 그는 돈이 필요했다. 어떤 상황이든, 돈만 준다면 상관없었다.
차가 멈춰 서자, 한동식이 거의 기다렸다는 듯이 뒷좌석 문을 열고 기어 들어왔다.
"가주세요! 빨리! 어디든 좋으니까, 제발 빨리 가주세요!"
그는 헐떡이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손님, 일단 진정하시고…."
"돈!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내 지갑에 있는 거 다 드릴 테니, 제발! 저 여자가 쫓아오기 전에 빨리요!"
돈. 그 말에 허승관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택시는 다시 어둠 속으로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한동안, 차 안에는 한동식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추격의 공포에서 벗어나자, 한동식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의 몸이 그를 배신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던 그의 괄약근이 풀리면서, 참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이 터져 나온 것이다.
뿌우우웅-
길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독한 냄새가 삽시간에 좁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썩은 달걀과 오래된 하수구가 뒤섞인 듯한, 끔찍한 악취였다.
순간, 허승관의 미간이 지독하게 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던 그의 신경을, 그 냄새가 정통으로 건드렸다.
"아이, 씨발! 차에서 방귀를 뀌면 어떡합니까!"
그는 창문을 열며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한동식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막 벗어난 그는, 고작 방귀 따위로 타박을 듣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운전사님! 말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사람이 긴장이 풀리면 그럴 수도 있지, 이게 그렇게 쌍욕까지 들을 일입니까? 고귀한 생리 작용 아닙니까? 냄새나면 창문 열면 되는 거고!"
그 말에, 허승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또다시 ‘툭’ 하고 끊어졌다.
‘고귀한 생리 작용?’
이 잘난 척하는 말투. 이 오만함. 이 ‘가진 자’의 여유.
허승관의 눈에, 한동식은 더 이상 겁에 질린 승객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의 공간을 더럽히고, 자신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세상의 모든 ‘가진 놈’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승관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다. 그는 차를 갓길의 으슥한 곳에 급정거시켰다. 그리고 그는 조수석 아래 서랍에서, 호신용으로 넣어두었던 날카로운 등산용 칼을 꺼내 들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지금?"
한동식의 얼굴에 다시 공포가 서렸다.
허승관은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칼을 든 채 그를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컥… 커헉…."
한동식의 입에서 비명 대신 붉은 피거품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몸에 박히는 칼날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불과 몇 분 전, 그는 한 여자의 칼을 피해 달아났지만, 결국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남자의 칼에 스러지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은 이토록 잔인하고 기괴했다.
허승관은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박하진의 얼굴 위로, 장미연의 얼굴 위로, 그리고 지금 한동식의 얼굴 위로, 그는 자신의 억울하고 뒤틀린 인생 전체를 향해 칼질을 하고 있었다.
한동식이 완전히 축 늘어지고 나서야, 허승관은 멈췄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한동식의 시체를 도로 옆의 어두운 도랑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지갑에서 두툼한 현금 뭉치를 꺼내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피 묻은 칼을 다시 서랍에 던져 넣고, 유유히 차를 몰아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비틀린 궤도는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충돌했고, 하나의 별은 완전히 빛을 잃었다.